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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읍 학평리 한봉수유적지(內秀邑 鶴坪里 韓鳳洙遺蹟地)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내수읍 학평리 한봉수유적지(內秀邑 鶴坪里 韓鳳洙遺蹟地)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3. 30. 15:53

 

학평리 양지바른 한쪽에 한말 항일의병장이였던 청암 한봉수선생의 묘소와 그의 영당이 자리하고 있다.지자체에서 잘 관리하고 있으며 주차장과 화장실등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다.

 

 

 

 

 

 

청암  한봉수 선생은 일명 봉서()·봉용()·봉룡(). 충청북도 청주 출신. 1907년 8월 의병장 김규환()을 만나 감화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의병에 가담하게 되었다. 청주 세교장()에서 기의하여 4년 6개월 동안 33전 1패의 전과를 거둔 유격전의 명수였는데, 17세부터 명포수로 알려질 정도로 총의 명수이기도 하였다.

진천() 문백리에서 일본군 헌병 중위 시마자키() 등 3명을 사살하고 그 무기를 노획한 것을 시초로, 약 30명 정도의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전으로 미원()·진천·괴산·횡성·장호원 등으로 출몰하면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상해()로 건너갈 생각으로 서울 선교사 집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다가 남대문역에서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교수형을 받았으나, 일제의 소위 ‘합방대사령()’으로 출옥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청주에서 시위하여 다시 2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1963년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한봉수 [韓鳳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향서 만세운동 주도하며 투쟁 펼친 뛰어난 후기 의병 < 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기획연재 < 기사본문 - 충청일보 (ccdailynews.com)

 

고향서 만세운동 주도하며 투쟁 펼친 뛰어난 후기 의병 - 충청일보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 복무1907년 군대 해산 후 의병 활약친일파 처단·무기노획 등 투쟁 공주재판서 교수형 선고됐으나경술국치 '합방대사령'에 석방1919년 세교리 장터서 만세시위19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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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말무덤에 자리하고 있는 한봉수의거비와 그 아래 자리하고 있는 일본군위령비가 있다.원래는 한봉수 의병장에 의해 사살된 일본군의 위령비가 현재 한봉수의거비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후세에 일본군의 위령비를 밑으로 내려 세우고 한봉수 의거비를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영당과 함께 한봉수 선생의 묘지도 잘 정리하여 놓았다

무덤에는 대리석으로 호석을 두르고 무덤 앞에는 의병장청암한봉수공묘비(義兵將淸菴韓鳳洙公墓碑)라 음각된 비석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