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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면 대명리 이문건의묘(文光面 大明里李文建의墓)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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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면 대명리 이문건의묘(文光面 大明里李文建의墓)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3. 3. 06:54

 

이문건의 묘지는 문광면 대명리 둑시마을 뒷산인 선산에 아들인 이온과 과 손자인 이원배의 묘소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이문건의 무덤아래 손자인 이원배의 묘가 있고 그 아레에는 아들인 이온의 묘가 있다.이문건의 묘는  경북 고령에서 이장하여 성주이씨의 선산이 있는 문광면 대명리에 안장하였다.이문건(文建:1494-1567)과 그 부인인 숙부인 김돈이(金敦:1497-1566)의 합장묘는 본래 경복 고령군 운수면 흑수산에 있었는데 2012년 5월 30일 수요일 괴산군 문광면 둑시 성주이씨 묘역으로 이장했다.

 

 

 

이문건(文楗) 1497(연산군 3)~1567(명종 22)자(字)는 자발(自發),호(號)는 묵재(黙齋)와 휴수(休叟)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이문건의 9대조인 이장경(李長庚)은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으로 농서군공(隴西君公)에 추봉(追封)되었다. 이는 성주이씨 중시조격으로 안일호장(安逸戶長)으로 등과(登科)하여 관계에 진출했다. 8대조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은 시조(時調) ‘다정가(多情歌)’로 유명한데,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역임했으며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으며, 문렬공(文烈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이문건의 아버지 이윤탁(李允濯 1462~1501)은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역임했다. 이문건의 아들 이온(李熅 1518~1557)은 일찍 죽었는데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증직받았다. 이문건의 손자 양아록(養兒錄)의 주인공 이수봉(守封 1551~1594 원배(元培)로 개명(改名)하였으며 첨정(僉正)을 지냈다.
이문건은 서울 주자동(鑄字洞)에 살았다. 그는 둘째 형 충건(忠楗)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중종(中宗)8년 1513년 20세에 큰형 홍건(弘楗)과 함께 진사시에 합격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남들은 화를 당할까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죽음에 조문하지 못했으나, 묵재는 중씨(仲氏)와 예를 갖춰 조문하고 장례를 지냈으니,그는 사제의 도리를 다한 강직한 선비였다. 둘째 형 충건(忠楗)이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 화를 당하여 묵재는 정거(停擧) 9년을 받았다. 1527년에 정거가 풀려 1528년 35세 별시 문과에 합격했다. 승정원 설서(說書)를 거쳐 사서(司書)가 되었다. 1545년 52세에 승정원 좌부승지가되었다. 이해 인종(仁宗)이 돌아가자 큰형 홍건의 아들 휘(輝)가 수찬(修撰)으로 있다가 군흉(群兇)의 무고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입었다. 즉 인종의 후사문제에 나식․곽순(羅湜․郭珣) 등과 택현설(擇賢說)을 주고 받았다 하여, 소윤(小尹)의 무고와 이덕응(李德應)의 자백으로 역모죄를 입고 휘가 효수당했다. 택현설은 인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반드시 명종을 보위에 오르게 할 것이 아니라 어진 인물을 선택하여 전위(傳位)해야했다는 것이다. 이 을사사화에 묵재 이문건도 연좌되어 성주(星州) 옥산리(玉山里)에 있는 아전(衙前) 배순(裵純)의 집에서 귀양살이했다. 이때 가족들도 이곳으로 이거했다. 이곳 에서 그는 58세 되던 1551년 손자 이수봉을 얻었다. 64세 되던 해인 1557년 이곳에서 그는 외아들 이온(李熅)의 죽음을 맞아야했다. 그는 23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74세인 1567년 2월 16일 서거했다. 묵재는 을사사화로 성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지금 충북 괴산군 문광면 대명리와 유평리 일대에 거처할 기반을 마련해놓았다. 묵재가 별세하자 손자 이수봉등 그 가족들은 지금의 충북 괴산으로 올라왔다.

 

 

 

 

이문건의 교유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묵휴창수(黙休唱酬)에 등장하는 인사만 들어보더라도 이황(李滉)․황여헌(黃汝獻)․송순(宋純)․이원손(李元孫)․송희규(宋希奎)․윤규(尹奎)․조욱(趙昱)․노진(盧禛)․조식(曹植)․이희안(李希顔)․권응정(權應挺)․노린경(盧麟慶)․여암(呂巖)․김우홍(金宇弘)․홍계현(洪繼玄)․권응인(權應仁)․유응벽(柳應璧)․김진종(金振宗)․김효갑(金孝甲)․이이(李珥)․황준량(黃寯良)․이세순(李世純)․오겸(吳謙)․성수침(成守琛)․신잠(申潛) 등이다. 이들은 당대 일류의 학자나 문인들이다. 이렇듯 묵재의 가계와 사우관계를 통해볼 때 유수한 가문으로 그 자신 사림(士林)으로서의 위상도 상당했다.
이문건은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근본적인 이유는 공맹(孔孟) 유학은 물론 성리학을 올바로 공부했기 때문에 고도의 심리학자이자 최면학자가 되었다. 그는 이를 문학과 예술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리하여 세상만물의 이치와 학문에 있어 박이정(博而精)하고 일람첩송(㊀覽輒誦)하고 온고지신했다. 온고지신은 창의응용력 즉 창용력(創用力)의 요체다.

 

 

 

 



 

 

양아록(養兒錄)은 이문건(, 1494~1567)이 손자 이수봉(,1551~1594)이 태어난 1551년부터 1566년까지 양육하는 과정을 기술한 현존 최고()의 육아일기이다.외아들 이온(, 1518~1557)이 귀하게 낳은 이수봉을 가통을 잇는 군자다운 인물로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지성으로 교육했다. 이런 할아버지의 마음을 손자 이수봉이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양육과정을 기록하여 책으로 남긴 것이다.

 

64세되던 1551년 손자 이수봉을 얻자, 외손자가 건강하고 훌륭하게 잘 성장하여 명문의 가통을 잘 계승하길 바랐기 때문에 단계적 계획을 세워 교육했다.

‘기어다니기’, ‘걸음마 연습’, ‘이 갈기’등, ‘말 배우기’ 등 손자의 성장발달과정을 연대순으로 잘 기록했다. 또한 ‘한문 독해 교육’ 등 교육내용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잘못을 시정해주는 교육방법으로 ‘말로 타이르기’, ‘손 들고 있기’, ‘종아리 때리기’ 등의 방법을 썼고, 교육원리로는 반복자극의 원리와 즉각시정의 원리를 적용했다. 사대부다운 인물로 키우기 위해 인성교육과 학식교육을 병행했다. 손자가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초제문()을 작성하여 초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질, 학질, 홍역 등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정황과 그 치료법도 알 수 있다.

 

손자 이수봉을 인품과 학문을 겸비한 전인적() 인물로 양육하려 했던 기록이 담겨 있다. 패륜적 행위가 극심화해가는 이 시대에 이문건의 교육방법을 재음미해볼 만하다. 현재까지 학계에 보고된 자료 중에서 자손교육의 체험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현존 최고()의 육아일기로 아동교육사와 질병치료법 등 풍속사회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양아록』(이문건 저·이상주 역주, 태학사, 1997)

 

 

유평리 마을입구에 근래에 새로 세운 이문건의 신도비이다.

이문건의 신도비옆에 이문건의 묘소위치라도 설명해 주는 입간판이 있으면 더 좋치 않을까 하는 사견이다.

 

 

 

 

 

 

 

그의 문학적 업적은 다음과 같다. 양아록(養兒錄)은 손자 수봉(守封)에게 식견을 갖춘 사대부(士大夫)다운 인물로 교육하는 과정을 기술한 현존 최고의 육아일기이다. 이문건은 단계적 발전의 원리와 자기계발(自己啓發)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어 16세기의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을 알 수 있다. KBS 1TV방송국에서 1997년 2월 18일 ‘역사추리 -조선시대육아리포트-할아버지가 쓴 손자의 육아일기’, 2009년 5월 18일 ‘역사추적 - 조선 선비의 육아일기’로 두 번 극화방영했다. 묵휴창수(黙休唱酬)는 이문건이 회갑을 맞아 이이(李珥), 이황(李滉) 등 당대 저명인사 33명의 친필 한시(漢詩)를 모아 엮은 현존 최고 최다(最多)의 회갑기념창수한시첩(回甲紀念唱酬漢詩帖)이다. 이문건을 비롯하여 16세기 사대부들의 충군우국(忠君憂國)의 도리와 곤경을 당해도 의연(毅然)하게 대처하는 자세를 잘 알 수 있으며 우도(友道) 및 서체(書體), 서품(書品), 서풍(書風)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현존 최초의 생활일기이
다. 묵재일기 3권 책장 안쪽에 필사된 셜공찬이(설공찬전)는 최초의 한글표기소설이다.

 

 

 

이문건의 묘에서 바라다 보이는 유평리의 모습이다.유평리와 인접한 문법리의 풍경도 한눈에 가득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