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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면 백봉리 경주김씨효열문(淸安面 白峰里 慶州金氏孝烈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청안면 백봉리 경주김씨효열문(淸安面 白峰里 慶州金氏孝烈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3. 5. 13:47

 

경주김씨효열문이 있는 백봉2리는 백봉1리에서 괴곡천을 따라 쇗맹이골 맞은편에 있는 홀미골을 지나 글께들에 효열각이 있는 손동마을이다.마을 동쪽에 위치한 큰 봉우리는 일출때는 물론 월출때 유난히 빛이나서 처음에는 월봉이라 불렀다. 조선 숙종1년에 마을의 이름을 백봉(白峰)이라 하였다.광복후에는 백봉2리로 분리되였다. 경주이씨의 세거지로 사는 호수는 약 50여호 된다.산세가 웅장하여 굽이굽이 봉을 이루고 있으며 전면에 큰산이 일봉을 이루고 있다.풍수지리설에 전산일봉에 문장출이라고 하였으니 학자를 많이 배출한 동네이다.

 

 

 

청안면 백봉리 마을입구에서 우측으로 보면 경작지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관리상태는 양호하며 철제울타리를 두르고있다.

정려현판에는 가의대부행동지돈녕부사이유근처정부인경주김씨효열지려 광무팔년심이월 명정(嘉義大夫行同知敦寧府使事李裕根妻貞夫人慶州金氏孝烈之呂 光武八年十二月 命旌) 이라고 씌여있다.

 

 

 

 

 

 

 

이유근(李裕根)의 처 경주김씨(慶州金氏) 경주김씨는 월사(月沙) 이항복(李恒福)의 후손 이순창(李淳昌)이 딸로서 시집오던 날부터 시부모를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고 집안의 모든 일을 오직 시부모의 뜻에 따라 처리하였다. 시어머니의 병이 위중하게 되자 잠시도 병석을 떠나지 않으며 의대를 풀지 않고 간병하였다. 간병을 하면서는 대변의 맛을 보아 병세를 살폈으며,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시어머니의 입에 흘려 넣어 며칠을 더 사시게 한 일도 있었다. 남편 이유근이 50대 초반에 풍질(風疾)에 걸려 위중하게 되었을 때는 마당 앞에 단을 설치하고 밤낮으로 자신이 대신 죽기를 하늘에 기도하였다. 이때 의원이 남편의 병에는 편복(蝙蝠, 박쥐)이 가장 좋은 약이라고 하였지만 갑자기 구할 방법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홀연히 박쥐 한 쌍이 날아들어와 그것을 잡아 삶아 먹게 하였더니 신기하게도 병이 나았다. 또 남편이 여든 살의 고령으로 다시 병상에 눕게 되었는데 김씨가 옆에서 지성으로 간호하였으나 효과가 없이 병세가 날로 악화되었다. 의원조차도 단념한 상태였는데 어느 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지네 두 마리를 달여 복용시키라고 하여 즉시 지네를 닭에 넣어 남편에게 복용시키니 병세가 호전되어 20여 일을 더 살았다. 그러나 천수가 다하여 마침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김씨 역시 지극히 애통해 하다가 성복(成服)하는 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남편의 빈소에 함께 모시었는데 빈소 옆에서 쌍무지개가 하늘로 뻗치고 하늘에는 자줏빛 구름이 덮여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1904년(광무 8)에 궁내부 장례원(掌禮院)에서 효열(孝烈)을 함께 갖춘 이 사실을 아뢰자 고종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명하여 정려하게 하였다. 현재 정려문은 청안면 백봉리 유동에 있다.【참고문헌】 『괴산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