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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미면 문강리 문바우(乷味面 文江里 문바우)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살미면 문강리 문바우(乷味面 文江里 문바우)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3. 14. 07:20

 

새터말 문산삼거리 자연가든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장연방면으로 가다 보면 윤갈미고개를 넘어 문강리에 이르게 되는데, 이 윤갈미고개 위에 우뚝 솟은 산이 문라산(해발 350m)이다.이곳 윤갈미고개의 도로가 확장 개수되기 전에 커다란 암벽이 있었고 그 바위에는 세로(長) 10척, 가로(幅) 8척의 여닫을 수 있는 문바위(門岩)가 있었다.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곳 문라산(文蘿山) 혹은 문협산(門峽山)에 오래전(고려 중기) 문라사(文蘿寺)라는 절이 있어 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었다 한다.

 

 

 

주지승이 항상 이르는 말 가운데 누구든지 어떠한 경우라도 고개 중턱에있는 문바위 문을 열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말이 있을수록
수행승들은 그 문을 열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었다.그러던 어느 해 가을 이곳 절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기슭 목화밭에서 예쁜 아녀자 한사람이 목화송이를 따고 있었는데 그 자태가 흡사 하늘의 선녀와도 같았다. 이때 절에서 바깥을 바라보던 수행승 한사람이 오랜 시각을 그 아녀자에게 시선을 두고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결심한 듯 절에서 뛰쳐나와 목화밭으로 달려갔다. 동료 수행승들이 그를 바라보려니까 그는 목화밭으로 달려 들어가 놀라 쳐다보는 처녀의 팔목을 잡아끌고 고개 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자 아녀자가 한쪽 손을 흔들며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에 법당에 앉아있던 주지승이 황급히 뛰어나와 수행승의 뒤를 쫓으며 고함을 쳤다.

 

 

 

이에 수행승은 이미 파계를 각오하던 차에 스님을 위시해서 동료 수행승들이 길목을 막아서자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바위문 쪽으로 달려가서는 전후 사정을 보지 않고 바위문을 열고 아녀자와 함께 그 속으로 들어가 문을 잡아당겼다. 순간 하늘에서 요란한 천둥이 울리면서 문라산 정상에서 안개비가 흘러내려 사람들의 시야를 가렸다. 이와 같은 광경을 보게 된 주지승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이제 법당이 욕을 보게 되었다”고 눈물을 흘렸다.
이윽고 수행승들이 몰려들어 바위문을 열고자 잡아당겼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고 도리어 문 사이에 있던 흔적마저 차차 없어져 몇 달 후에는 아주 한 덩어
리 바위로 변해 버렸다. 따라서 그 바위 속에 들어간 수행승과 목화 따던 처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 후 문라사는 점점 그 믿음의 빛깔이 퇴색되어 갔고, 산이 울고 흔들리면서 절이 흔들리고 기울어지더니 마침내 심한 소나기 비바람이 불던 날 밤에 쓰러
지고 말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 절에 안치되었던 불상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이 절을 버리고 서천으로 가셨다면 절을 유지할 수 없는 노릇이다’하여 그곳에 있던 스님들도 한사람 두 사람 그곳을 떠나 그 절은 마침내 폐사(廢寺)가 된 후 오랜 풍우(風雨)에 흔적조차 없이 되어버렸는데, 주지승이 그 후에 입적할 때 상좌승(上座僧)이 한 가지만 가르쳐 주고 입적하라고 사정을 하면서 그 파계승이 처녀를 데리고 들어간 바위문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지승은“그곳이 바로 토계나락(土界奈落)으로 들어가는 문 이니라”하고 숨을 거두었다. 토계나락은 지옥을 말한다.

 

 

 

 

그 후 이곳이 바위문이 있는 산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을 문산이라고 불렀고 또 한편 마을은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 있던 곳이라 해서 토계리라 불러 오늘에
이른다고 전한다.
문 모양으로 생긴 바위는 1964년 경 괴산 - 살미간 국도를 내면서 매몰되었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복원하고 1999년도에“윤갈미고개 문바우 유래비”를
세워 후세에 전하고 있다

 

 

 

문바우 유래비는 가로 155cm, 세로 108cm, 높이 69cm의 화강암받침돌 위에 너비 140cm, 높이 280cm, 두께64cm의 화강암 비신을 세우고“문바우 윤갈미고개 유래비”라 음각하고 받침돌 중앙에 가로 75cm,세로 48cm의 오석을 붙이고“문바우 윤갈미고개유래”를 새겼다.


■ 내 용 : 문바위에 대한 유래. 고려시대에 이곳에 문바우(바위)가 있어 문바우고개라 불리기 시작한 이 고개는 부근에 목화밭에서 목화따던 처녀를 스님이 데리고 문바우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여 인가문(人家門)이라고도 불리게 되었으며 이 구렁을 인가문골이라고도 했다.
서쪽에 절이 있어 많은 스님이 왕래하였으며 부근에 절에 대한 전설이 많다.
서기 1612년(광해 4년) 해평윤공 (휘 성임)께서 광문병과에 합격한 후 한림삼사를 역임한 뒤 보덕공을 제수받고 낙향 중 인가문 고개를 넘다 목이 말라 사
경을 헤메던중 마침 조그마한 샘물이 있어 기갈을 면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하여 그 후 이 고개를 윤갈미(尹渴迷) 또는 윤갈문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문바위는 서기 1970년 도로공사로 매몰되었던 것을 2000년 초에 동민이 합심 발굴하면서 유래비를 세우다. 서기 2000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