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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면 두모리 이위재영세불망비(文義面 斗毛里 李渭在永世不忘碑) 본문
왜 보지 못했을까?몇 번이고 다닌 길이지만 이상스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길가에 자리잡고 있는 비석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뭔가 딴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인데......문의현령과 군수를 지낸 영세불망비 4기와 경주김씨 문중에 시헤비가 1기 자리하고 있다.서로가 다른곳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편의에 의해 한 곳으로 모아 놓은것 같다.
이위재(李渭在)는 승정원 일기를 살펴보면 1866년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시작으로 남평현감(南平縣監)등을 역임하고 고종12년(1875년)문의현령으로 제수된다.문의현령은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875~1877년까지 문의현령을 지내게 된다.
아마 선정비는 1877년 이후 세워진 것이 아닐까 한다.
有政。 吏批, 判書金在顯·參判尹滋承進, 參議未差, 承旨缺, 以閔奎鎬爲內閣提學, 閔泳商爲承旨, 朴齊寅爲右參贊, 金在鶴爲敦寧都正, 金翊鎭爲捲草官, 許傳爲藝文提學, 徐相德爲敦寧參奉, 李復永爲注書, 鄭晉默爲高陽郡守, 趙冕夏爲淸道郡守。 開城分敎官單崔柱錫, 前持平李敏銖, 年七十一, 副司果朴載瑋·前別提全宜鍾, 已上, 年七十已上今加通政, 加一資事承傳, 高嶺僉使閔義鎬·礪山府使權寅秉, 已上相煥事, 承傳。 再政。 以金元植爲知敦寧, 李渭在爲文義縣令, 全東爀爲安峽縣監, 校書提調單閔奎鎬。 三政。 以閔泳稷爲南平縣監。 四政。 以魚秉璿爲景慕宮令。 五政。 以成純永爲繕工主簿。 六政。 以秦錫好爲典獄主簿, 故吏議閔東鏞, 贈吏參例兼, 故正郞閔致福, 贈吏議, 已上, 右尹閔泳穆兩代。[승정원일기 131책 (탈초본 2811책) 고종 12년 3월 2일 기해 28/33 기사]
현령이후위재애민선정영세불망비(縣令李侯渭在愛民善政永世不忘碑)라고 적혀있다.비석의 재질이 좋치않아 파손의 속도가 빠르다.조선조때 문의현령을 지낸 이위재의 영세불망비이다.원래 두모리 입구에 있던 비석이였는데 도로확장 공사로 인하여 현 자리로 이건하였다.비석을 가까운 문의 문화재단지등으로 이동하여 보존하였으면 하는 사견이다. 비석을 바라보며 가장 우측에 자리한 비석이다.
현령 이위재의 불망비는 문의 문화재단지 비석거리에 1기 자리하고 있다.문의현에는 현감이 아닌 현령이 파견되였다. 현감은 종6품이지만 현령은 종5품의 품계로서 품계가 한단게 더 높다.조선시대에 유일하게도 충청도에서는 문의에만 현령이 파견된다. 현령이 파견된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박희실(朴希實)이라는 특별한 인물에 의거하여 문의가 대접을 받았다고나 할까?
박희실은 고려말의 무신으로서 1258년(고종 45)에 신의군도령낭장(神義軍都領郎將)으로서 유경(柳璥)·김인준(金仁俊, 金俊)·이연소(李延紹)·박송비(朴松庇)·김승준(金承俊)·임연(林衍)·이공주(李公柱) 등과 함께 최씨무신정권의 마지막 무인집정이었던 최의(崔竩)를 죽이고 정권을 왕에게 돌렸으며, 그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봉하여졌다. 그 해 장군이 되어 조천주(趙天柱)·박천식(朴天植) 등과 함께 몽고에 가서 최씨무신정권의 타도를 알리고 몽고군의 철수를 청하였으며, 이듬해 돌아와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259년(원종 즉위년)에 몽고 사신 어산(於散)이 개성 환도가 지연됨을 문책하자, “내가 황제를 알현할 때 궁실을 짓는다면 3년이 걸릴 것이라고 하였고, 또 사왕(嗣王 : 元宗)이 몽고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결정할 수 없다.” 고 말하여 말을 더 못하게 하였다. 뒤에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1258년(고종45)무오년에 문의(文義)를 위사공신 박희실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문의현령으로 승격하였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하는 대목이 있다.왕실에 큰 은헤를 끼친 박희실의 내향이라는 점에 문의현은 조선시대에 충청도에서 유일한 현령(縣令)파견지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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