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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가 마루 밑에 암장한 한산 이씨 후손 번창 본문

전설따라 삼천리/역사의 뒤안길(야사)

관가 마루 밑에 암장한 한산 이씨 후손 번창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5. 21. 23:12

금장지역에 암장해서 발복한 사례는 흔히들 충남 한산 이씨 시조를 든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로 추측되고 있다. 

한신 이씨의 선조는 몹시 가난해서 고을의 관청에서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한산 이씨 시조 이윤경(李允卿)으로 알려진 그는 관가의 현감이 앉아 있는 마루의 널빤지가 매년 조금씩 썩어내려가는 것을 발견했다. 습기도 없는 집에 마룻바닥이 녹아내리는 것은 분명히 명당의 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들에게 자기가 죽으면 그곳에 몰래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자손들은 그의 유언대로 어둠을 틈타 관가의 마룻방 밑으로 뻗쳐 맺힌 혈장에다 암장해서 그 명당의 발복으로 이색(李穡) 같은 명인을 냈다는 것이다. 

그 후손인 이곡(李穀), 즉 고려말 원나라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에 2위로 급제한 충신이요 학자인 이곡 선생이 득세할 무렵, 관가의 마루방 밑에 암장한 사실이 탄로나고 말았다.

당시의 법에 관가영역은 금장지역으로 되어 있어 처벌을 받아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에 암장하고 그 명당의 효험으로 이색 같은 충신이 나와 나라에 공헌하고 있는 터라 임금은 선조의 무덤을 옮기는 것보다 차라리 관가를 옮겨 달라는 이색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자 이색은 자리를 들여 관가를 옮겼다. 그것이 지금의 면사무소 자리라 한다.

현재 옛 관가 자리에 잘 모셔져 있는 이윤경의 묘 비석에는 ‘고려호장 이공지묘(高麗戶長 李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이것은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 박사가 1925년 제출한 한 ‘고적답사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암장이 가장 심했던 곳은 장단(長湍)이었다는 것. 장단은 개성에 인접해 있어서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 많다. 이 고분들이 거의 명당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옛 무덤을 파헤치고 그곳에 새 무덤을 쓰거나 암장했다. 

이 같은 사례들은 ‘장단읍지(長湍邑誌)’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명당의 발복을 굳게 믿어온 사람들에게는 명당은 바로 후손의 출세와 부귀의 지름길로 생각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길지에다 뼈를 묻으려다 보니 이런 암장이 성행했던 것이다.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