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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면 수룡리 정경연유허비(老隱面 水龍里 鄭慶演遺墟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노은면 수룡리 정경연유허비(老隱面 水龍里 鄭慶演遺墟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6. 8. 06:59

 

중앙탑면에서 새로난도로를 따라 노은면으로 접어들면 수룡리 못미쳐 작은 야산에 자리하고 있는 鄭慶演의 유허비이다.

구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쉽게 만날수 있다.정경연의 유허비는 1986년 후손들에 의하여 이 자리에 세워졌다. 

 

유허비(遺墟碑)라 함은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를 칭한다.유허란 유지()·유적()·구기()와 같이 ‘남긴 터(자취)’·‘옛터’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하거나 귀양살이하였던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경연(鄭慶演)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선여(善餘). 증조할아버지는 송강 정철(鄭澈), 할아버지는 강릉부사를 지낸 정명(鄭溟), 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정직(鄭溭), 어머니는 사헌부감찰을 지낸 박준(朴峻)의 딸 비안박씨이다. 슬하에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정수(鄭澍), 통덕랑에 오른 정린(鄭潾), 상의원정을 지낸 정필(鄭泌), 정섭(鄭涉), 영의정을 지낸 정호(鄭澔), 영동현감을 지낸 정진(鄭津), 순릉참봉을 지낸 정온(鄭溫), 이조판서에 추증된 정영(鄭泳) 등 8형제를 두었다.


 

 

 

 

1604년(선조 37) 태어난 정경연(鄭慶演)은 1630년(인조 8)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현 충주 노은면 수룡리로 이주해 어머니를 모시면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1643년(인조 21) 영릉참봉, 1645년 경기전참봉, 1648년 전생서봉사를 거쳐 사헌부감찰 재직 중 병으로 사직하고

충주로 돌아왔다.

1656년(효종 7)에 다시 사헌부감찰에 기용되었다. 이후 청안현감으로 부임하여 뛰어난 공무 집행 능력을 보여주었으나 1658년 병으로 다시 사직하였다.

1664년 다시 기용되어 내자시주부, 평릉도찰방을 지냈다. 1665년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은퇴하고 충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666년(현종 7) 6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 화영산에 있다. 묘갈은 박세채(朴世采)가 비문을 지었고, 수암 권상하(權尙夏)가 표문을 지었다.

유허비 전면에는 유명조선통훈대부행사헌부감찰청안현감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영일정공경연유허비(有明朝鮮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淸安縣監贈大匡輔國崇祿大夫義政府嶺義政迎日鄭公慶演遺墟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후면에는 정경연의 행적이 기술되여 있다.


 


 

정경연(鄭慶演)
▣항렬 : 延日(迎日,烏川)鄭氏 監務公派 14代孫, 文淸公派 3代孫, 江陵公派 2代孫
▣벼슬 :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
▣연대 : 1604(선조 37)∼1666(현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선여(善餘). 서울출신. 영의정 정철(鄭澈)의 증손으로, 생원 정직(鄭◎)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서 자랐다. 어려서 입학하였으나 지극한 정성으로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정진하여 침식을 잃는 일이 많았다. 1643년(인조 21) 향천(鄕薦)으로 영릉참봉(英陵參奉)에 기용되었다. 그 뒤 지방의 수령으로 여러 곳을 돌아다녔으나 검소한 생활과 부지런한 정무로 주민에게 모범을 보여서 청렴결백하다는 찬사를 들었다. 천성이 효성스러워서 홀어머니를 50여년이나 모셨는데, 관에 봉직하는 이외에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외지에 부임할 때에도 어머니를 항상 모시고 갔다. 뒤에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이 되었으나 1665년(현종 6)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이듬해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 너무 애통한 나머지 병을 얻어 한달 만에 죽었다. [참고문헌] 老峯集.(權五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