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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김인문묘비(慶州博物館 金仁問墓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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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김인문묘비(慶州博物館 金仁問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9. 16. 06:59


신라시대의 장군 김인문의 묘비이다 . 묘비는 높이 63㎝, 너비 94.5㎝, 두께 18.4㎝.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 비문은 26행이며, 자경은 약 2.3㎝이다



높이 63㎝, 너비 94.5㎝, 두께 18.4㎝.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문은 26행이며, 자경()은 약 2.3㎝이다. 1931년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서악서원(西)의 누문인 영귀루() 서편 부근에서 잔석()으로 발견되었다.

잔석은 원비()의 하부로 상부 절반 이상이 결손되었고, 풍화가 심하여 판상()에 따라 앞뒷면의 사이가 둘로 갈라졌으며, 비면에는 훼손된 흔적이 있다. 한쪽 면에 새겨진 약 4백자의 비문은 3.3㎝ 크기의 방형 정간() 속에 음각되었다. 서체는 해서()로 초당()의 글씨에 뒤지지 않는다.

이 잔석 중 판독된 ‘조문흥대왕()’, ‘태종대왕탄미기공()’, ‘공위부대총관()’ 등은 《삼국사기》 열전 김인문조에 “······태종대왕이 그에게 압독주() 총관()을 제수하였다. 이에 그가 장산성()을 쌓아 방어시설을 하니 태종이 그 공을 기록하고 식읍() 300호()를 주었다.”라고 한 그의 사적에 해당된다.

이 밖의 비문내용도 그가 당나라에 가 건봉() 원년(666)에 벼슬을 제수 받은 사실과, 백제를 항복시키고 고구려와의 싸움에 참가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부합되는 점이 많다.

비의 건립연대는 현존 비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며, 695년(효소왕 4) 경주 서쪽에 매장하였다는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으로 보아 7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낭선군() 이우()의 《대동금석서 》에서는 이 비의 탑본()을 김유신묘비로 잘못 추정하였으며, 그 서목()인 《대동금석총목 》에서는 “함형 4년에 세웠는데, 경주에 있다.”라고 하였다.

낭선군이 탑본을 수집할 당시 이 비가 경주에 있었으므로 적어도 조선 효종·현종 때까지는 남아 있었으나 이미 전문()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었던 듯하다. 통일신라 초기의 확실한 금석문의 하나로 신라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김인문 묘비 [金仁問墓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인문(金仁問)은 629(진평왕 51)∼694(효소왕 3). 신라 삼국통일기의 장군·외교관이다.


그가 태어난 7세기 전반기에 신라는 안으로는 진평왕이 정치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왕권 안정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으나, 밖으로는 신라의 팽창에 대항하여 백제·고구려의 결속이 촉진되면서 이들의 신라 공격이 적극화되고 있어 국가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때 김춘추는 김유신계열과 결속하여 신흥세력을 이끌면서 선덕왕·진덕왕을 세워 구귀족의 반발을 무마시켜갔다. 특히, 642년(선덕여왕 11)의 대야성( : 지금의 합천) 함락은 김춘추·김유신 가문의 결속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전기로 김춘추는 정치·외교 활동에 새로운 방향을 맞게 되었다.

특히 김춘추는 고구려원병에 실패하고 또 일본방문에서도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꾀하게 되었다. 먼저 648년(진덕여왕 2)에 아들 김문왕()을 대동하고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원조의 약속을 얻어냄으로써 김문왕을 숙위(宿)로 머물게 하였다. 그 뒤 신라와 당나라의 원활한 관계와 군사적 협조 등 여러 가지 문제해결에 주역을 맡기도 하였다.

651년에 김문왕과 교대하여 숙위로 파견되어 당나라 조정에 머물면서 양국간 현안문제에 있어 중개 임무를 맡게 되었다. 23세에 당나라에 가서 좌령군위장군()이라는 직함으로 5년간 머물면서 백제정벌에 따른 구체적 문제를 협의하였다.

656년(무열왕 3)에는 그에 대한 준비를 명목으로 한 번 귀국했으나, 실제로는 아버지 태종무열왕의 즉위에 따른 인사와 아울러 국내의 전략 점검을 위한 태종무열왕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숙위는 다시 김문왕으로 교대되었고, 귀국과 동시에 압독주()의 군주()가 되어 장산성()의 축조를 감독했는데, 이러한 군주생활이 유일한 국내 정치활동이었다. 따라서, 그의 군주 임명은 백제정벌의 군사작전 및 진격로의 최종 점검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658년 다시 당나라에 가서 660년 백제정벌의 당나라측 부사령관인 신구도행군 부대총관()으로서 사령관인 소정방()을 도와 수군과 육군 13만을 거느리고 백제정벌군을 지휘하였다.

백제의 지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작전수행상의 이점이 있어 당군의 선봉을 이끌고 덕물도( : 지금의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이어 기벌포( : 지금의 장항)에서 백제군을 무찌른 뒤, 7월에 김유신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하였다.

이후 소정방이 의자왕, 태자 융() 및 고관 93인과 1만 2,0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가자, 김인문도 사찬() 유돈()·대나마() 중지() 등과 함께 숙위를 계속하였다.

661년(문무왕 1) 6월에 귀국하여 고구려 정벌의 시기와 방법 등을 통고했고, 이어 7월에는 고구려 정벌을 위한 임시군을 편성하여 진주()·흠돌()과 함께 대당장군()이 되었다.

8월에 김유신의 진두지휘하에 고구려 정벌을 떠나 평양 근교까지 이르렀으나 일기 불순과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당군이 퇴각했고, 신라군도 후퇴하였다. 이 때 추격하는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1만여급을 목베는 대전과를 올려, 김유신과 더불어 본피궁()의 재화·전장()·노복을 받게 되었다.

662년 7월 제4차로 입당하여 고구려 정벌의 실패 요인을 검토하고, 우선 시급한 백제 잔적의 토벌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664년에는 납치해 갔던 백제의 왕자 융과 함께 귀국하여 백제 구귀족의 회유 및 포섭에 나서게 되었다. 또한 웅진도독()으로 임명된 융과 웅진에서 만나 천존()·유인원()과 함께 화친의 맹약을 맺음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 사건은 신라의 고구려정벌을 보다 쉽게 하여, 그 해 7월 군관() 품일()과 함께 일선()과 한산()의 군대와 웅진성의 병마를 이끌고 고구려 정벌을 꾀했을 때 그 첫번째 전과로서 돌사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665년에 숙위하던 김문왕이 죽자, 제5차로 당나라에 가서 이듬 해 당나라 고종()을 따라 태산에 가서 봉선을 했으며, 그 때 우요위 대장군()이 되었다. 666년에는 삼광()·한림()과 숙위를 교체하고 귀국하여 이적()의 고구려 정벌을 위해 신라측이 협조할 사항을 전달하였다.

668년 6월 당나라 고종의 칙지를 가지고 당항진에 닿은 유인궤()와 삼광을 맞아들여 최종적인 고구려 정벌 작전을 수립하였다. 이 때 흠순·천존 등과 함께 대당총관()이 되어 김유신을 도와 북진을 시작했으며, 김유신이 풍병()으로 출정하지 못하자 신라군 사령관으로서 이적의 당군과 함께 9월에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적의 당군이 고구려의 왕과 왕자 복남()·덕남() 및 대신 등 20여만 명과 함께 귀환할 때, 대아찬() 조주()와 함께 다시 당나라에 갔다. 그 때 문무왕에게서 대각간()의 벼슬을 받고, 계속 숙위로 당나라에 머물면서 양국간 분쟁을 조정하였다.

특히, 당나라의 영토적 야욕을 목도한 신라는 백제·고구려 잔민을 앞세워 당군을 공격하는 등 대대적인 배당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러한 양국간의 대립은 671년의 설인귀()의 항의문과 왕의 답서에 잘 나타나 있다.

674년 신라가 고구려의 반란민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고토를 잠식하면서 노골적인 대당항쟁을 계속하자, 당나라는 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세우고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이필()과 이근행()을 부관으로 하여 쳐들어 왔다. 이에 왕이 형식상 사죄사를 보내자 김인문도 도중에서 돌아가 임해군()으로 봉해졌다.

그 뒤 여생을 그 곳에서 보냈으며, 양국간의 정치적 분쟁도 거의 사라져 대우를 받았다. 679년 진군대장군 행우무위위 대장군()에 전임되고, 690년(신문왕 10) 보국대장군 상주국 임해군 개국공 좌우림군 장군()을 제수받았다.

694년(효소왕 3) 4월 당나라 수도에서 죽었다. 당나라에서는 그의 유해를 사례시 대의서령() 육원경()의 호송으로 본국으로 옮겼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을 추증하고 다음 해서악(西)에서 장례를 치렀다. 무덤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다.

김인문 [金仁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