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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달천 충렬사비(御製 達川 忠烈祠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어제 달천 충렬사비(御製 達川 忠烈祠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6. 16. 16:30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단월동
 임충민공 충렬사 경내에 있는 조선 후기 임경업을 기리는 비.
[개설]
임경업(1594~1646)은 조선 인조 때의 명장이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이며 본관은 평택이다.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하여 1633년(인조 11) 명나라의 반란군을 토벌한 공으로 명나라 황제로부터 총병의 관직을 받았다. 병자호란 때에는 백마산성을 수비하며 청군의 진격을 둔화시키고자 하였다. 이후 철저하게 친명배금(親明排金)의 노선을 견지하다가 청나라에 포로가 되었고 심기원(沈器遠)의 옥사에 연루되어 본국에 송환되었다가 옥중에서 죽었다. 1693년 숙종의 특명으로 복관되었으며, 정조는 어제 비문을 짓고, 『임충민공실기(林忠愍公實記)』를 간행하는 등 임경업에 대해 시대를 뛰어넘어 그 행적을 기렸다.
[건립경위]
정조가 찬한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숙종 때 복관된 임경업에게 충민(忠愍)이란 시호를 내렸고, 영조 때는 충주 사람들이 화상을 그려 달천의 옛 집터에 사당을 세우자, 나라에서 충렬(忠烈)이라 사액하고 향전을 나누어주었다. 정조 즉위 후 사당이 황폐해졌다는 말을 듣고 수리와 화상의 모본을 명하고 작설(綽楔)을 세워 정려하였으며, 1791년(정조 15)에 임경업의 절의를 기리는 비를 세웠다.
[위치]
국도 3호선 충주 입구에서 수안보 방면으로 진행하면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 정문이 나온다. 약 300m 정도 더 진행하여 좌회전하면 사적 제189호로 지정된 임충민공 충렬사가 나타난다. 임충민공 충렬사 경내 사당 오른쪽에 완산이씨 정렬비와 같이 나란히 비각이 세워져 있다.
[형태]
비좌개석의 형태이며, 비의 대석은 화강암으로 비의 크기에 비하여 규모가 크다. 비신은 높이 183㎝, 너비 71㎝, 두께 42㎝이며, 개석은 지붕돌의 형태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 상단에서 좌횡으로 ‘어제
달천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라 전서하였는데, 글자의 크기는 9×13㎝이다. 비문은 정조가 찬하였고, 비제는 ‘달천충렬사비(達川忠烈祠碑)’라고 음기되었다. 본문 글씨는 3×3㎝의 크기로, ‘자헌대부예조판서겸지경연사동지성균관사홍문관제학규장각검교직제학신이병모교근서(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奎章閣檢校直提學臣李秉模敎謹書)’라 쓰여 있고, ‘보국숭록대부판돈영부사겸이조판서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신윤동섬(輔國崇祿大夫判敦寧府使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臣尹東奉敎謹篆)가 전(篆)하였다. 앞면과 뒷면의 글자는 총 1,420여 장에 달한다.


[현황]
임충민공 충렬사는 1697년(숙종 23) 창건되었고, 1727년(영조 3) 사액된 이래 여러 차례 보수되었으나 퇴락하고 규모가 작아 1978년에 해체, 중건하면서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인 팔작지붕의 사당으로, 오른쪽에는 겹처마 팔작지붕의 비각이 서향하고 있다. 사당 입구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