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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교평리 관찰사 민치상영세불망비(靑山面 校平里 觀察使 閔致庠永世不忘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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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교평리 관찰사 민치상영세불망비(靑山面 校平里 觀察使 閔致庠永世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1. 17. 08:17


민치상(1825(순조 25)∼1888(고종 25)은 조선 후기 공청도관찰사를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여흥(). 자는 경양(), 호()는 하당(). 증조할아버지는 민각수()이며, 할아버지는 민백준()이고, 아버지는 민용현(閔)이다. 어머니 김씨()는 김세순()의 딸이다.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5대손이다.

민치상은 1845년(현종 11) 생원이 되었고, 이듬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1849년(현종 15)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다. 1850년(철종 1) 진하사은겸세폐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56년(철종 7) 홍문관부응교·예방승지, 1859년(철종 10) 성균관대사성, 다음 해 홍문관제학을 역임하고 이어 도승지에 올랐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영의정 김좌근()과 신정왕후() 조씨()의 전교를 받들어 고종을 그의 잠저에서 궁궐까지 시위했으며, 1866년(고종 3) 이조참판이 되었다. 다음 해 공청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재임 중 E. J.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이 일어났다.

1870년 민비의 척족이라는 정치적 배경에 힘입어 형조판서로 승진했고, 이어 동지겸사은정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판서·공조판서·병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74년(고종 11) 호조판서에 시강원좌부빈객()을 겸하였고, 1876년(고종 13) 판의금부사까지 겸했다. 1878년(고종 15) 이조판서를 거쳐, 1881년(고종 18) 제도의 개편으로 전선사() 당상에 올랐다. 다음 해인 임오군란 때 반군에게 습격당하여 가옥이 파괴되고 저격당했으나 무사했으며, 1885년(고종 22)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청풍팔경()을 읊은 「팔영시()」가 전한다 [한국학 중앙연구원]




비석의 건립시기는 신미년 (辛未年) 7월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관찰사민공치상영세불망비(觀察使閔公致庠永世不忘碑)라고 음기되여있다.



덕산굴총사건이라고도 한다. 오페르트는 1866년 2차에 걸친 한국과의 통상요구에 실패하고 돌아갔다가, 1868년 4월 제3차 한반도답사를 계획, 한때 상하이 미국영사관에 근무한 미국인 모험가 F.젠킨스를 자본주로 하고, 프랑스 선교사 페롱을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대동하여 차이나호()에 백인 8명, 말레이시아인 20명, 한국 천도교인 약간 명, 청국인 승무원 약 l00여 명을 태우고 상하이를 출항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그들은 북독일연방()의 국기를 게양하고 충청도 홍주군() 행담도()에 와서 정박하였다가, 구만포()에 상륙하여 러시아 군병이라 자칭하면서 함부로 총칼을 휘둘러 지방관헌조차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 다음, 어둠을 타서 덕산 가동()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덕산군수 이종신()과 묘지기 및 몇몇 주민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무장한 서양인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날이 밝아 주민들이 몰려오며 내하()의 퇴조(退)시간이 임박해지자 이들은 관곽()까지 파낸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구만포로 퇴각하였다.

2일간에 걸친 이 사건이 관찰사 민치상()에게 알려지자 즉시 군관 100여 명을 출동시켜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 소식이 중앙에 전해지자 대원군은 양이()의 추적을 명하는 동시에, 이러한 괴변은 필시 천주교도의 내응() 향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국내에 남아 있는 천주교도를 더욱 엄중히 단속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은 비록 미수에 그치기는 하였으나 국민에게 악감정을 일으키고,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의 항해목적은 뒷날 젠킨스가 법정에서 진술한 바에 의하면, ① 조선왕국과 통상조약의 체결을 교섭하는 것, ② 조선의 사신 1명을 배에 태워 세계일주여행을 시키자는 것, ③ 이와 같이 하여 은둔국인 조선을 세계에 소개하자는 것 등이었다고 한다.

남연군분묘도굴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