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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서면 금산리 효녀사비옥금정려문(郡西面 金山里 孝女私婢玉今旌閭門) 본문
군서면 금산리로 들어가는 증산마을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옥금의 정려문 입니다.
충청북도내에 있는 정려문중 어찌보면 유일한 노비의 정려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옥금에 대한 이야기는 옥천군지와 실록등 문헌들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아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면서 옥금의 정려문과 함께 있는
김영복과 김건의 이야기와 함께 섞이면서 전해지는 이야기로 추정됩니다.
조선왕조실록 『현종』조 11년(1670년) 윤2월10일자 에는 `면천의 노예 계원과 옥천 사람 옥금(玉今)에게 정문을 세워주어 표창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표창한 까닭에 대해서는 `옥금은 나이 17세로, 그의 어미를 구하려고 맹렬한 화염 속에 뛰어들어 갔다가 어미를 업은 채로 함께 타 죽었다'라고 기록했다. 또 고쳐 쓴 현종개수실록 11년 조에도 역시 같은 날짜에 옥금을 정려한 이유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실록에 의하면 옥금은 주인을 따라 죽은 것이 아니라 역병(천연두)에 걸린 어머니가 있는 천막에 화재가 나자 불 속에 휩싸인 어머니를 구하려다 함께 죽은 것이다. 어머니를 등에 업은 모습의 죽음으로 발견되였다고 한다.왕조실록과 옥천향지의 기록을 볼 때 옥금이 노비로 대표되는 천인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도 옥금이 나오는 분류가 천인(賤人)으로 되어 있기 때문. 이에 반해 옥금을 정려한 연대와 효녀로 정려한 이유는 다릅니다.
옥천군지에 전하는 이야기는 옥금은 효자 김영복의 사비(몸종) 이었다. 평소 주인 김영복을 충심으로 받들었고, 사리에 밝아서 모든일에 충실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뜻밖에도 집안에 불이 나서 주인 김영복이 부친 궤연이 불에 타자 “아버지를 두 번 죽게 하였다”는 죄책감으로 주인이 불속에 뛰어 들어 타 죽는 것을 보고 있던 몸종 옥금은 “주인이 불에 타 죽은데 종년이 살아서 무엇하겠느냐?”고 하며 불에 뛰어 들어 함께 죽고말았습니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1560년(명종16년)에 그의 주인 김영복, 김건과 함께 충복(忠僕)으로, 그리고 효녀(孝女)로 정려되었습니다. 특히 정문을 세울 적에 김영복의 정려문을 세우는 공사도중 정문이 쓰러지고 불길한 일이 생겨서, 사비 옥금의 정문을 먼저 세우고 나서 주인 김영복의 정문을 세우니 공사가 순조로와 비로소 정문이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 들은 주위 사람들이 다시한번 감동하였다고 합니다.
옥금의 정려문은 김영복과 그의 고손자 김건의 정문 옆에 1평정도의 별채로 건립하였으며 다른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효녀각이다. 정문 편액은 “효녀 사비 옥금지려” (孝女私婢玉今之閭)라고 각자 되여 있습니다.
이렇게 효자 김영복, 그의 고손자 김건 그리고 그의 사비 옥금이 모두 효자로 정려되어 군서면 금산리 함창 김씨 효자정려문에 함께 헌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울창한 수목이 자라고 금천리 장령산 휴양림 들어가는 길가에 있으며 경관이 수려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 윤2월 10일 정유 4번째기사 1670년 청 강희(康熙) 1670년 청 강희(康熙) 9년
○旌表沔川奴戒元、沃川人玉今, 戒元救其弟氷陷而溺, 忘生投水, 一時渰死。 玉今年十七, 欲救其母, 奔入烈焰, 負母同死。 道臣馳啓, 故有是命。
면천(沔川)의 노예 계원(戒元)과 옥천(沃川) 사람 옥금(玉今)에게 정문을 세워주어 표창하였다. 계원은 얼음이 꺼져 물에 빠진 그의 아우를 구하려고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함께 빠져 죽었으며, 옥금은 나이 17세로 그의 어미를 구하려고 맹렬한 화염속에 뛰어들어 갔다가 어미를 업은 채로 함께 타 죽었다. 감사가 치계하여 이 명이 있었다.
군지와 실록의 이야기가 같이 전해지면서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요리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옥천향지에는 김영복의 몸종인 옥금을 정려한 연대가 명종 15년(1560년)이라고 밝히고 있고 실록에는 이보다 110년 후인 현종 11년(1670년)에 효녀로 정려한 기록이 보인다. 옥금이 죽은 이유에 대해서도 기록이 다르다.
옥천향지에는 주인이 불에 뛰어들어 죽으니, 따라 죽은 것으로 밝히고 있지만 실록에는 어머니를 구하려다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인 1899년에 편찬된 옥천군읍지의 인물편 기록에 의하면 「효자」조에 옥금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옥천군읍지의 기록에는 옥금이 김영복의 노비가 아니라 그의 고손자인 김 건의 노비라고 표기하고 있고 죽은 이유에 대해서도 역병(전염성 열병)에 걸린 어머니가 있는 천막에 불이 나자 어머니를 구하려다 함께 죽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여기서 옥금과 관련된 주인의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영복 효자가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은 때가 조선 태종 7년(1407년)이었고 고손자인 김 건 효자의 경우 명종 15년(1560년)에 정려를 받았다. 옥금의 경우 향지의 기록대로라면 1405년에 세상을 떠났고 1407년에 효자문 정려를 받은 김영복 효자의 몸종이어야 하는데 정려는 1560년에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옥천군읍지의 기록을 따르자니 몸종으로서 주인이 불에 타 죽자 따라 죽어 효녀로 정려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실록의 기록을 기준으로 볼 때 옥천향지에 보이는 옥금에 대한 기록은 김영복 효자와 김 건 효자 사이의 일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였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왕조실록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수긍을 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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