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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 신봉동유적(淸州博物館 新鳳洞遺蹟)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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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 신봉동유적(淸州博物館 新鳳洞遺蹟)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2. 14. 08:48


국립청주박물관에 마련된 신봉동유적입니다.

충청북도지역내 삼국시대의 무덤중 최대규모의 고분군입니다.1982년부터 2013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서 발국조사를 진행했습니다.

많은 유물중에서 마구류와 철제무기등이 다수 발견됨으로서 무덤의 주인의 신분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백제고분문화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발견된 백제의 산성, 고분, 주거 유적입니다.

청주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처음 보이는데, 63년(백제 다루왕 36, 신라 탈해이사금 7)에 백제가 청주로 비정되는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진출하여 신라와의 화의를 요청하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후 청주 인근 지역을 두고 백제와 신라는 오랜 공방전을 벌이게 되면서, 청주의 지정학적 위치를 가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초기 기록의 내용은 후대의 사실이 소급, 기록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만 청주를 포함한 소백산맥 일대의 여러 교통로와 산성들의 분포를 통해 백제, 신라,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역사적 사실 만큼은 크게 주목되는 점이다.

한편, 이러한 초기 기록을 제외하면 신라가 이 지역에 진출하기까지의 시간은 고고학적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고고학적 자료를 통하여 청주 지역 초기 역사의 전개와 백제 중앙세력과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초기 토착적 문화기반 위에 외래적 요소를 적극 수용한 청주의 초기문화는 4~5세기를 거쳐 백제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중앙과는 다른 고유한 색채를 유지하며 발전하여 갔다.

청주는 미호천(美湖川)과 그 지류인 무심천(無心川)을 배경으로 한 풍부한 경제적 혜택이 일찍부터 정착생활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였다. 이에 따라 일찍부터 많은 문화유적을 남기게 되었다. 청주의 백제 유적은 크게 산성, 고분, 주거 유적으로 나눌 수 있다.

청주 주변에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축조된 산성이 분포한다. 청주 정북동 토성은 평지 방형 토성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사례이다. 금강 중상류인 미호천(美湖川) 가에 위치하여 청주의 초기 정치세력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미호천(美湖川)을 통한 경제적 기반과 함께 방어시설인 토성의 축조를 통한 정치·군사적 성장 기반을 마련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청주의 서쪽 관문에 해당하는 부모산성에서는 ‘전(前)’자명 기와가 발견되어 웅진-사비기에 활용된 산성으로 밝혀졌다. 이 밖에 정식 학술조사를 거치진 않았지만, 와우산성(우암산성)과 당산토성은 토축 산성으로 백제 토기편이 다수 발견되어 일찍부터 고지를 활용한 방어시설로 추정된다.

방어시설로서의 산성과 함께 청주 지역에서 두드러진 분포를 보이는 문화유적은 고분 유적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신라가 청주에 진출하는 시기까지 연속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송절동·봉명동유적에서는 전통적인 토광묘의 다양한 사례들이 확인되어 마한에서 백제로 이어지는 역사 전개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청주 백제유적의 중심인 청주 신봉동 고분군은 석실분을 비롯하여 수많은 토광묘 집단 묘역으로 확인되어 청주를 중심으로 펼쳐진 백제의 활발한 대외 활동의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청주 신봉동 고분군과 거의 비슷한, 혹은 조금 늦은 시기에 조영된 명암동유적·가경동(佳景洞)유적에서는 청주 전역에 폭넓게 분포한 백제인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밖에 청원군 지역의 상평리유적·송대리유적·주성리유적은 미호천(美湖川)을 넘어 보다 확대된 청주 지역세력의 존재 양태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들이다. 당시 백제인들의 삶의 직접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주거 유적은 고분에 비해 적은 수를 차지한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례는 봉명동유적에서의 집단 취락과 명암동유적에서 일부가 확인되었다.

평지의 청주 정북동 토성과 송절동유적·봉명동유적을 배경으로 성장한 초기 백제시기 청주의 정치세력은 점차 백제의 중앙세력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중앙세력은 이 지역의 뛰어난 경제적 기반을 통해 청주를 영토 확장과 대외 정복전쟁의 전진 기지로 삼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청주지역은 고구려의 남하와 신라의 북진 등 삼국 항쟁의 최전선이 되었고, 신라가 진출하기까지 전략적 중요성과 함께 발전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주에 산재해 있는 백제 유적을 통해 청주의 초기 역사를 밝힐 수 있으며, 백제의 영역 확대와 지방통치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청주지역 백제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문헌기록에 보이지 않는 청주 지방 세력의 발전, 중앙세력의 영역 확장과 지방통치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