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군서면 금산리 금천사석조(郡西面 金山里 金川寺石槽)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군서면 금산리 금천사석조(郡西面 金山里 金川寺石槽)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1. 30. 17:39



가는 날은 공사가 한참이다.

지금 동네가 앉아있는 곳이 예전의 금천사지 자리인 듯 하다.



먼저 옥천군과 함께 발굴팀이 집지을 자리를 발굴했다고 한다. 집지을 곳을 유물이 최대한 적게 나온쪽으로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 곳이 절터임을 입증하는 유물이 지금의 석조와 이 곳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부도날에 있던 부도가 절터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원래의 석조는 이 곳 개울가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이 또한 원래의 자리는 아니며 절터에 인가가 들어서면서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다

이 곳 개울가에 자리하고 있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였다고 한다.동네 주민들 사이에 석조의 위치를 두고 설왕설래 말이 많은것 같다.

절터가 있던 곳을 발굴하면서 석조를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석조를 개인이 자신의 땅으로 옮기느냐 마느냐 하며 말들이 주민들 사이에 많은데

개울가의 후미진 곳보다 깨끗하게 잘 보존되여 있는 지금의 자리가 좋은 듯 하다.

아래사진은 개울가에 자리하고 있던 원래의 석조가 있던 자리이다.



석조가 있는 금산리(金山里)는 원래 옥천군 군서면 월서화리(越西化里)에 속해있던 마을로서 후에 동평리와 금산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 기록에는 군서면 월서화리라 하여 88호가 살았으며, 1891년 기록에는 100호가 살았는데, 이때는 동평리와 금산리를 관할하였다. 1908년 군,면 조정 때 군서면을 군서일소면(郡西一所面)과 군서이소면(郡西二所面)으로 나누었으며, 월서화리는 이소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의 전면조정 때 일소면과 이소면을 합하여 다시 군서면으로 고치면서 이때 월서화리를 동평리와 금산리로 나누었다. 금산리라 부르게 된 것은 자연마을을 합쳐 새로운 리동을 만들면서 금이 많이 나는 광산이 있었고 조선시대 중기까지 금천사라는 큰절과 서대산에서 내려오는 맑고 깨끗한 큰 하천이 있기 때문에 붙은 금천(金川)과 신라 때 고시산군의 소재지였다는 ‘시림이’(식율평(食栗坪), 시름뜰)를 시루로 해석하여 시루증(甑) 자와 뒤에 산이 있다 하여 메산(山) 자를 써서 증산(甑山)이라 부른 증산에서 각각 한 자씩을 딴 것이다.


금산리의 자연마을은 금천, 시림이(시루미, 증산동), 음지서화, 잿말 등이 있다. 2007년말 현재 증산리에 58호 153명, 금천리에 58호 131명이 살고 있다.


증산리에는 아버지의 신주가 불에 타자 불에 뛰어들어 죽은 김영복 효자와 김영복 효자의 현손으로 효성이 지극해 조정에서 불러도 나오지 않았던 김건 효자에게 조정이 내려준 효자문이 있다.
이 효자문 옆에는 병든 어머니가 있는 여막이 불에 타자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함께 타죽은 김건 효자의 몸종 옥금 효녀문은 우리고장 유일한 노비 효녀문이다.


고시산군의 소재지였던 시림이 마을은 고려 때까지 관아터가 있었던 곳이고, 금천천 건너편에 있는 음지서화에는 관리들의 집터가 주로 있었다고 전한다. 특히 관제 성격의 마조제를 옥천읍과 군서면 사이에 있는 마성산에서 지냈다고 하는데, 주민들은 매년 섣달 그믐날 시림이 마을에서 마성산을 바라보며 제를 올리고 있다.


장령산과 마성산 사이에는 예부터 군서 사람들과 금산 사람들이 옥천읍 장을 보던 큰 길이었던 사목(士目)재가 있다. 군서와 옥천읍을 연결하는 큰 길이었던 것이다.


금천리 양짓말에는 큰 절이 있던 흔적이 있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고암 정립 선생이 금천사(金川寺)에서 공부를 했다는 일기를 쓴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직전까지는 절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마을에는 물을 받았던 큰 석조와 부도가 있어 부도날이라고 불렀던 지형이 있고, 영동 영국사에서 텃세를 받다가, 20여년 전에 주민들에게 터를 매각했다고 전한다.


서대산과 장령산을 휘돌아 수려한 자연을 빚어낸 금천계곡은 옥천군내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손꼽히며 여름철 대표적인 행락지다. 조헌 선생이 우리 고장 아홉 곳의 절경을 시로 풀어 ‘율원구곡가(栗園九曲歌)’를 지었는데, 그 곳 중 하나가 금천계곡과 장현봉(장령산)이었다.


현재 장령산휴양림이 조성돼 해마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을 숲속으로, 계곡으로 끌어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