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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남면 삼용리소성군채신보신도비(遠南面 三龍里 邵城君蔡申保神道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원남면 삼용리소성군채신보신도비(遠南面 三龍里 邵城君蔡申保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4. 3. 10:22



삼용리 고갯길을 넘다보면 좌측으로 새로운 비석이 보인다.

소성군 채신보의 신도비이다. 후손들에 의하여 새로 제작하여 세워 놓았다.

옆의 길을 따라 오르면 채신보의 묘지도 볼수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 발길을 돌렸다.



채신보는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문신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자휴(子休), 호는 만계(灣溪). 아버지는 사예(司藝) 채륜(蔡倫)이고, 아들은 나재(懶齋) 채수(蔡壽)이다.


채신보는 1438년(세종 20) 18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함창현감(咸昌縣監)을 거쳐 1458년(세조 4)부터 1465년(세조 11년)까지 7년간을 음성현감으로 재직했다. 그 후 경산현감(慶山縣監)·평해군수(平海郡守)를 거쳐 1482년(성종 13)에 남양도호부사(南陽都護府使)를 지냈다. 이후 1484년(성종 15) 64세부터 처가가 있던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물언덕에 소산정사(梳山精舍)를 짓고 산수와 벗하며 유유자적하게 여생을 보냈다.

강희맹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라서 강희맹이 『소산정사기(梳山精舍記)』를 썼다고 한다. 채신보가 함창현감을 퇴직한 후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강희맹과 우연히 만났는데 강희맹은 채신보를 보고 “채만계가 평소에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문아(文雅)를 좋아하며 몸은 관직에 있었으나 산림을 그리워하며 숭상하는 것이 진실로 세속 선비와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미 세상일을 하직하고 한가히 살게 되었으니 반드시 좋은 산수가 있어 지극한 낙(樂)을 삼아서 세상 생각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채신보의 사고방식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 다음에 채신보가 또 편액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니, “그 산을 소산(梳山)이라 하고 물을 만계(灣溪)라 하는 것이 좋겠다”고 답하였다. 강희맹이 또한 말하기를 “이 사람이야말로 군자다. 후에 역사가가 국사를 편수하게 되면 장차 그대를 은일전(隱逸傳) 가운데 둘 것인지 또한 장차 어진 사대부의 예(例)에 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벼슬을 하고 못하는 것은 운명이니 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만계는 더욱 마땅히 자신의 처한 바를 살펴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만계의 인품을 짐작하게 한다.





저서로는 『만계집(灣溪集)』이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물언덕에 있으며 묘역은 약 200평으로 묘비와 상석, 사각(四角) 망주석을 갖추고 있다. 1964년에는 다시 문인석·망주석을 추가로 세웠고 신도비도 마련하였다. 아래로는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지은 묘비가 있는데 ‘소성군채신보지묘정부인문화유씨묘정덕삼년구월일자인천군수입석(邵城君蔡申保之墓貞夫人文化柳氏墓正德三年九月日子仁川君需立石)’이라고 새겼다.


중종 때 아들 채수가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오르면서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지자 채신보는 이조판서에 증직(贈職)되고

소성군(邵城君)으로 추봉되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에 있는 채신보의 묘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1982년에 출간한 『내고장 전통가꾸기-음성군-』에 수록된 이후 『음성의 구비문학』과 『음성군지』 등에 실려 전한다.


채신보(1420~1489)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58년(세조 3)에는 음성현감을 지내기도 하였다. 1482년(성종 13)에 남양도호부사를 지내고 퇴임한 뒤 음성군 삼용리 물언덕에서 여생을 보내다 향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자손들은 그의 묘소를 이곳 삼용리 뒷산에 마련하였다.

채신보의 아들 채수는 조선왕조 5백 년을 통털어 단 두 명밖에 없다는 삼장장원의 한 사람으로, 대사성과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경상북도 함창에서 여생을 보냈다. 채수는 젊었을 때는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느라 자주 성묘를 오지 못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함창과 음성이 너무 멀어서 3,4년에 한 번 정도 문중 사람들과 성묘를 하러 왔다.

그런데 이런 이유 말고도 채신보의 묘소를 자주 찾아오기 어려운 이유가 또 있었다. 그것은 성묫길에 반드시 일행 중 누군가가 호환을 당하기 때문에 문중 사람들이 성묘 오기를 주저하였던 것이다. 어느 해, 길지를 찾아 이곳 삼용리를 찾아온 지관이 채신보의 묘를 보고 탄식하기를, “관운은 자손 백대에 이르겠으나 호환을 막을 수도 없겠구나.” 하였다. 때마침 이 소리를 채씨 문중 사람이 듣고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지관은, “채공의 묘는 그 산세형국이 복호형이어서 자손이 성묘를 가면 반드시 호환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대책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함창채씨들은 그후로 성묘를 할 때는 채신보의 묘소가 마주 보이는 맹동면 통동리와 접경에 있는 도마치에서 멀리 망배만 하고 돌아왔고, 그로부터 호환을 당하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채신보의 묘와 호환」은 풍수 설화 중 음택에 관한 이야기로, 풍수 형국을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비보 모티프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