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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천리 백양동 독립만세운동유적비(草川里 栢陽洞 獨立萬歲運動遺蹟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초천리 백양동 독립만세운동유적비(草川里 栢陽洞 獨立萬歲運動遺蹟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5. 21. 07:06

 

뱅거리는 구례골 북쪽, 소여리로 넘어가는 구리고개 왼쪽 끝, 보현산 자락에 숨어 있다. 뱅거리 회관 옆엔 3·1독립만세운동 유적비가, 그 뒤편 산기슭에는 백청사(栢淸祠) 백청묘원(栢淸墓苑)이 있어 초계정씨 세거지임을 알려준다.


초천1리에는 전국적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인물은 없지만, 지역에서 나름대로 위치를 잡고 활동하는 인물들은 많다. 앞서 언급했듯이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영익, 정민영, 정대영, 최만득 공과 같은 애국지사가 있었다.


삼봉(三鳳) 김영익 선생은 초천리 148번지에서 출생했다. 선생은 서울에서 살다가 내려와 1919년 3월 27일, 초천리 정기선의 백양서당에 가서 서당학생 정문영, 정대영, 최만득에게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계몽하였다. 다음날 오후 2시경 이들은 선생과 함께 음성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했다. 다시 4명은 4월 6일 밤, 산 위에서 약 5백여명 군중과 함께 횃불을 들고 시위하다가 모두 체포됐다가 방면되었다. 이 기념비들은 방문객들과 주민들에 애국애족의 자긍심을 전하고 있다.
또 뱅거리 마을 산기슭에는 초계정씨 세거지를 알리는 백청사(栢淸祠) 백청묘원(栢淸墓苑)이, 구례골을 관통하는 도로 위로는 안동김씨 세거지를 알리는 사당이 각각 서 있다. 이를 보면 초천1리 주민들이 가문의 자부심과 효의 전통을 지켜가고 있음을 짐작하고 남는다.



음성군내에서의 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충청북도 음성군 일원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살펴본다.


일제의 한국 강점과 무단통치에 대항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일원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1919년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에 걸쳐 군내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에서는 초천리 서당에 다니던 김영익·정민영·최만득·정대영 등의 주도로 1919년 3월 28일 장날에 만세운동이 발생하였다.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漢川] 장터에서는 김을경·이중곤·권재학 등의 주도로 수많은 군중이 장터에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시위군중은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민병식을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본경찰이 출동하여 주도자를 연행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들은 주재소로 달려가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히 항쟁하였다. 그러나 충주에서 응원 출동한 일본수비대의 무차별 발포로 십여 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에서는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박병철·민병철·박영록·박제성 등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 2일 밤, 대소면 오산리에 있는 대소면사무소에는 사전 약속에 따라 천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들은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였으며,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때 면장과 면 직원들이 나타나 시위의 중단과 해산을 종용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들은 대소면사무소의 유리창과 기물을 부수고 장부를 파손시키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인 뒤 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진천 수비대가 응원, 출동하여 무력으로 시위군중을 해산시켰다.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에서는 이성용의 주도로 4월 2일 삼성면 선정리와 삼성면 천평리 일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성용은 이날 밤 수십여 명의 주민들과 선정리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다음,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가 있는 천평리로 이동하여 격렬한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이 밖에도 군내 각 지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에서는 1919년 4월 1일에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2일에는 감곡면 주천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4월 3일 밤에는 감곡면 문촌리에서 수십 명의 주민들이 송석봉의 주도로 응봉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음성군 맹동면에서는 3월 20일, 주민 수백여 명이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벌였고, 4월 2일에는 맹동면 소재지가 있는 쌍정리 뒷산에서 김화서·김해룡·백순규 등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음성군 원남면에서는 4월 5일, 보천시장에서 시위군중들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11일에는 원남면 주봉리에서 80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를 외쳤다. 음성군 금왕읍에서는 4월 2일, 금왕읍 내송리에서는 1천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에서 시작된 만세시위 운동은 음성군 일대로 확대되었고 군중들의 저항이 격렬해졌다. 그러자 출동한 일본수비대는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무차별 발포를 실시하여 십여 명의 군중들이 부상을 입거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음성군 삼성면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이성용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출국하였으나 일본의 감시와 탄압이 극심하여 결국 자결하고 말았다.

3·1운동에 관한 통계자료인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3·1운동 당시 충청북도 음성군 일대에서 6회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2,000여 명의 군중이 참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일제와의 충돌로 6명이 순국하고, 10명이 부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음성군에서 일어난 3·1운동은 타 지역에 비해 늦게 시작되었고, 그 규모도 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음성군 전역에서 거의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항쟁도 격렬하였다. 특히 음성군 소이면 한천장터 시위는 충청도 안에서 순국자가 많이 발생한 지역으로 손꼽을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영익은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입니다.
본관은 안동(安東).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148번지에서 김수홍(金壽洪)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27일 충청북도 음성읍 초천리에 있는 백양서당(栢陽書堂)에 다니던 정문영, 정대영, 최만득 등과 음성 장날에 맞춰 시위를 벌였고, 3월 28일에도 음성시장에서 시위를 하였다. 4월 6일 밤 산 위에서 약 5백여 명의 군중과 횃불을 들고 시위하다가 4명 모두 붙잡혔다. 이후 구속되어 징역 4개월 형을 받았다. 김영익은 서울에서 살다가 음성으로 내려왔으며, 60세에 사망하였다.



정민영은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정민영은 1901년 1월 7일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881번지[초천로174번길 19-7]에서 문묘 직원이던 정모선(鄭謨善)의 차남으로 출생하였으며, 1970년 12월 6일에 향년 70세로 별세하였다.

1919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백양서당에 다니고 있던 정민영은 평소 알고 지내던 김영익(金榮翼)으로부터 3·1운동이 확산하는 상황을 전해 듣고, 음성 지역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당시 정기선(鄭騏善)이 훈장으로 있던 백양서당에 다니는 최만득(崔萬得), 정대영(鄭大永)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추진하여, 1919년 3월 28일 음성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거사에 필요한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28일 오후 4시에 정민영은 서당 동료들과 함께 음성시장에 집결하여 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만세 운동의 선두에서 시가 행진을 하였으며, 1919년 4월 6일 밤 횃불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대를 선고받아 상고하였으나, 동년 5월 5일 경성복심법원과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형(刑)을 받았다.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