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경주김씨
- 곡산연씨
- 단지주혈
- 보성오씨
- 티스토리챌린지
- 공주박물관
- 효자문
- 충주박물관
- 오블완
- 상당산성
- 청풍문화재단지
- 충북의 문화재
- 각연사
- 밀양박씨
- 효자각
- 화양동 암각자
- 선돌
- 한독의약박물관
- 법주사
- 문경새재
- 문의문화재단지
- 청주박물관
- 부도
- 화양구곡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사과과수원
- 사인암
- 국립청주박물관
- 공산성 선정비
- 부여박물관
- Today
- Total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사리면 사담리 면사무소분수대(沙梨面 沙潭里 面事務所噴水臺) 본문
사리면 사담리에 있는 사리면사무소에 있는 분수대 석조물입니다
관련된 신문기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충북 괴산군 사리면사무소에는 아픈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석물이 하나 있다.사리면사무소 연못에는
용 문양을 양각한 90×90×60㎝ 크기의 6면체 분수대가 있다.
이 분수대는 1942년 사리면 방축리 삼거리 마을 동쪽 언덕에 세운 일본 신사(神祠)에서 가져다 놓았다.참배객은 신사 참배에 앞서 손과 입을 씻어야 하는데 그때 쓰던 석물로 추정하고 있다.일본어로 테미즈야(手水舍) 또는 쵸즈야라는 시설물에 놓은 수반(水盤)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테미즈야 수반이 면사무소 연못의 분수대로 사용한 사연은 이렇다.
사리면 신사는 광복 후 격분한 주민이 헐어버렸고 그곳에는 많은 석물이 나뒹굴고 있었다.
1956년 봄에 당시 손근성 면장이 주민 10여 명을 동원해 신사 터에서 이 수반을 면사무소로 옮겨 연못을 파서 그 안에 놓았다.
서울 등지에서 용을 새긴 이 수반을 사 가려고 했으나 손 면장은 팔지 않았고 그뒤에도 면에 잘 보존해야 한다고 거듭 부탁했다.
손 면장은 이 수반을 잘 보존해 후세에 교훈으로 남겨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사 참배는 일제강점기 많은 한국인에게 강요한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일제는 '1면 1신사 원칙'을 내세워 강제로 신사를 건립하도록 해 광복 직전 충북에는 109개 읍·면 중 74곳에 신사를 세웠다고 한다.
일제가 한국인의 참배를 강요한 이 신사는 광복 직후 대부분 철거했지만 일부 지역에는 당시의 시설물이 남아 있어 식민지 민족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사리면사무소 인근 사담리 하도마을에는 신사 터에서 옮겨 놓은 3개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에는 '재건청년회', '하도농업협동조합', '荷島'(하도) 등의 문구를 음각했다.
1961년에 세운 이 비석 뒷면에는 신사 건립 당시 새긴 문구를 쪼아낸 흔적이 보인다
'충북의 바람소리 > 괴산군(槐山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광면 유평리 이해순포효비(文光面 柳坪里 李海順褒孝碑) (0) | 2018.06.18 |
---|---|
사리면 사담리 군수이인석영세불망비(沙梨面 寫潭里 郡守李寅鉐永世不忘碑) (0) | 2018.06.18 |
사리면 이곡리 해평윤씨토지지신비(沙梨面 梨谷里 海平尹氏土地地神碑) (0) | 2018.06.16 |
사리면 이곡리 윤길구,호구공적비(沙梨面 梨谷里 尹吉求,浩求功績碑) (0) | 2018.06.16 |
사리면 이곡리 윤의영불망비(沙梨面 梨谷里 尹義榮不忘碑) (0) | 2018.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