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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군도안면김창익효자각(曾坪郡道安面金昌翼孝子閣) 본문
김창익(金昌翼) 효자각은 이곳에 낙향해 살던 김창익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서 도안면 광덕2리 경로당 앞의 큰 느티나무 옆에 위치해 있다.
효자 김창익은“어머니의 머리에 종기가 생겨 위급하게 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입으로 어머니가 호흡할 수 있도록 돕고, 간호해 병환을 낫게 했다. 그러나 또 다시 병이 위태롭게 되자, 그는산토끼의 회를 먹어야만 나을 수 있다는의원의 말을 듣고, 다른 형제들과 여러곳으로 이것을 구하러 다녔으나 구하지 못하고 안타까워했다. 이때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했는지 장독대 근처에 산토끼 한 마리가 나타나서 도망을 가지않고 있기에, 이를 잡아 어머니에게 드리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김창익의 집안과 이 일대의 선비들은 이러한 그의 효성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철종 8년(1857) 김국주 등이 충청감사에게 김창익의 효행에 대한 글을 올렸고, 철종 13년(1862)에는 청안 현감에게 그의 효행사실에 대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 편액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고종 19년(1882)에 정려가 내려졌고, 그후 대한제국 4년(1900)에 효자비와 효자각을 세웠다.효자각의 건물은 정면 1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이며, 효자각 안에는“孝子慶州金公昌翼之閭”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정각 앞에는“孝子
金公昌翼之閭壬午七月日”이라는 비를 세워놓았다 [증평문화원]
김창익은 1818년(순조18)에 태여나 1892년(고종29)에 죽었다
이 효자각은 이곳 광덕리에 낙향하여 살던 김창익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김창익은 어려서 부터 부모님을 잘섬기며 효행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어머님이 머리에 종기가 나서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자신의 입으로 종기를 빨아내며 어머님의 생명을 연장시켰다고 한다
산토끼회가 병에 좋타는 소리를 의원으로 부터 듣고 산토끼를 구하려고 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그러나 하늘도 김창익의 효에 감탄하여 집 장독대근처에 산토끼가 있어 도망가질 않으므로
어머니께 산토끼회를 대접할수가 있어 생명을 구하였다고 한다
이에 유림과 집안에서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여러차례 글을 올려 1882(고종19)정려가 내려졌고 1900년에 효자비와 효자각이 세워졌다
효자각 한편에 김창익의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글씨가 잘 보이질 않는다
이 곳은 마을사람들이 효자마을이라는 자긍심이 대단하다
효자각옆에는 김창익의 5대손인 김지전의 공덕비도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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