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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면 적성산성사적비(丹城面 赤城山城寺跡碑) 본문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예서(隷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 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문화재청 자료에서 옮김).
적성산성을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단양수몰전시관에서 비석과 암각자를 본 후 산쪽으로 난 시멘트길을 따라 가면 된다.
교행할수 없는 좁은 길이다.길을 따라 가면 작은 주차장을 만날수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길을 재촉하면 적성비와 함께 적성산성을 볼수가 있다.
단양을 비롯한 제천과 충주 등 남한강 유역은 삼국시대에 남쪽으로 세력을 뻗으려던 고구려와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려던 신라가 마주치던 싸움터였다. 이 지역 곳곳에는 그 시절부터 축조된 산성들이 여럿 남아 있다. 적성 또한 그러한 산성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신라의 옛 성이라고만 알려졌을 뿐 성의 이름과 내력은 세월에 묻혀 있었다. 이 성의 이름과 성격이 밝혀진 것은 1978년 성안에서 비가 발견됨으로써이다.
적성과 적성비를 보려면 단성면 하방리 뒷산인 성재산을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 도중에 단양 수몰이주기념관을 지나쳐서 다시 서너 구비 돌며 산으로 올라가노라면 제천과 영주 사이를 잇는 중앙고속도로 공사장이 가로지르고 주변은 옥수수 밭이나 도라지 밭 등이 펼쳐진다. 비탈 사이로 냇돌 박고 시멘트로 바른 계단을 오르다보면 크고 작은 돌덩이가 너덜지대처럼 펼쳐지는데 그것이 성벽 무너진 자취이다. 거기쯤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끊어지고 이어지며 산을 둘러나간 산성의 줄기가 가늠된다.
비는 성 안쪽, 높직하고 평평하게 다진 대지 위에서 발견되었다. 높이는 1m가 채 안되고 윗너비 1m 가량, 아랫너비 0.5m 남짓한 역사다리꼴 화강암비이다. 발견 당시 지붕돌이나 받침돌 없이 비석만 땅에 묻혀 일부가 드러나 있었다. 이곳을 지나다니던 등산객들이 그 드러난 부분에 신발에 묻은 흙을 털곤 했다고 한다. 모양으로 보아 지붕돌은 원래 없었던 듯하고 받침돌은 비의 아랫부분을 꽂아 세우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은 윗부분이 크게 깨졌고 군데군데 튀듯이 깨져나간 곳이 있다. 그러나 땅 속에 묻혀 있었던 덕분에 남은 비문의 자획이 깨끗하고 또렷한 편이다.
비면에는 글자들이 가로세로 줄을 반듯이 맞추어 얕게 음각되어 있다.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국 남북조 초기의 글자체와 일치하는 글자들이다. 비문은 모두 440자 가량이었을 것으로 추산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288자이다.
그 내용은 대개 진흥왕이 이사부, 이간, 내예부, 대아간, 무력 등 10명의 고관에게 일러 야이차의 공을 표창하며 앞으로 야이차와 같이 신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포상을 내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야이차는 본디 적성사람으로서 신라의 척경사업을 도와 목숨을 바쳤다. 다시 말해 비문은 신라가 적성땅을 새로 점령한 후 그 과정에서 공을 세운 현지인의 노고를 기리는 한편 앞으로도 충성을 다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로써 적성비는 현재 남아 있는 진흥왕 순수비들처럼 새로운 점령지의 민심을 다독거리면서 새 영토에 대한 국가시책을 포고하는 취지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에서 날짜를 밝혀줄 첫머리가 깨졌으므로 비를 건립한 절대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비문에 등장한 인물들의 관등, 활동시기 등의 정황으로 보아 진흥왕 6년(545)에서 11년(550)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흥왕 순수비 네 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 창녕비이다. 그렇다면 적성비는 왕이 직접 점령지를 순행하고 세운 척경순수비들에 앞서, 그 선구적 형태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비문에는 ‘적성’이라는 말이 세 군데에 등장한다. 지금의 단양은 고구려의 적성현으로 신라가 점령한 후에도 적성이라 불렸다. 신라는 일찍이 아달라왕 5년(158)에 죽령 길을 개척한 후 진흥왕 대에 비로소 죽령 너머 북쪽으로 진출, 고구려땅이던 적성현을 빼앗아 성을 쌓고 본격적인 북방 경략의 거점을 마련하였다. 비를 뒤로 하고 동남쪽으로 내다보이는 터진 골이 죽령 방향인데 그 너머가 영주, 안동 등 신라의 땅이었다.
비가 서 있는 곳 주변에는 인위적인 토축 흔적과 더불어 옛 건물터가 있다. 근처에서 기왓장, 삼국시대와 통일기 신라의 토기조각들, 칼이나 화살촉 등 금속제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여기 있던 건물들은 위치나 적성산성과의 관계 등으로 보아 당시의 지휘본부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적성비는 국보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적성산성은 성재산 꼭대기와 남쪽으로 흘러내린 비탈을 빙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923m인데 현재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고 북동쪽 끝에 높이 3m 가량의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문 자리는 남서쪽, 동쪽, 남동쪽의 세 군데에서 확인되었고 남한강 줄기에 면한 북쪽에는 없다. 여기서도 이 성이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에서 북쪽에 대응하기 위해 쌓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벽은 돌과 진흙으로 기초를 다진 후 거의 손질하지 않은 자연석을 안팎으로 포개며 엇물려 쌓은 내외협축 방식으로 되어 있다. 성벽의 안쪽은 바깥쪽에 비해 그리 높지 않다. 이 안쪽은 사람과 말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평평하게 다져져 있으며 건물이 있었던 듯한 장소도 있다. 이런 식의 성 쌓기는 삼국시대 신라나 백제의 산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적성이 있는 성재산은 신라땅이던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쪽에서 오자면 죽령을 넘어 남한강을 건너기 바로 직전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동쪽과 서쪽은 각각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죽령천과 단양천으로 감싸여 방어에 유리하며 사방을 살필 수 있는 요충지이다. 뿐더러 남한강 줄기를 따라 상류와 하류로 이어지는 교통로와 남쪽으로 죽령을 넘는 육로 등 중요한 길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간다. 따라서 적성은 삼국시대 초기부터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던 곳이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 신라의 기와나 토기조각이 많이 발견되며 일부에서는 고려시대의 토기와 청자조각도 발견되었다. 이로써 이 산성이 삼국시대에 쌓아져서 격렬한 각축장이 되었고 대략 고려 말까지 성의 구실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적성산성은 사적 제2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적성비와 적성산성(답사여행의 길잡이 12 - 충북, 초판 1998., 6쇄 2003.,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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