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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읍 교성리 현감윤치응선정비(鎭川邑 校成里 縣監尹致膺善政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진천읍 교성리 현감윤치응선정비(鎭川邑 校成里 縣監尹致膺善政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9. 19. 10:40



헌종 5년 6월 29일  계사 1839년 / 韓益東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洪 稚圭爲同經筵, 韓弼敎爲禮賓主簿, 李晉會爲大興縣監, 尹致膺爲鎭川縣監, 李濟夏爲禮山縣監, 嚴錫鼎爲唐津縣監, 李翊會爲大司憲, 韓宓履爲執義, 金德喜爲司諫, 曺錫亨爲掌令, 金榶爲兵曹參知, 趙文和爲尙瑞副直長, 朴商壽爲典籍, 韓正敎爲鎭安縣監, 鄭基三爲抱川縣監, 李蹊爲扶餘縣監, 李容象爲巨濟府使, 李根永爲順川郡守, 韓大爀爲南海縣令, 金最善爲濟...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尹致膺은 1839년에 진천현감에 제수되며 1841년에 공주판관으로 옮긴다.
윤치응(尹致膺)의 자는 취여(就汝)이며 1794년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해평(海平)이다.아버지는 이참(吏參)을 지낸 윤명렬(尹命烈)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현감윤공치응선정비(縣監尹公致膺善政碑)라고 적혀있으며 비의 건립시기는 숭정후4신축정월(崇禎後4辛丑正月)/1841년 이다.

야외전시장에 있는 선정비중에서 현감서응순비와 함께 같이 건립한것으로 추정된다.비석의 크기나 글씨가 같아 보인다.




윤치응의 아버지인 윤명렬에 대하여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윤명렬의 아비 면동은 글을 읽어 단정하고 결백한 선비다. 그런데 그의 자식이 글을 잘 못한다는 말은 이상하오.”

 

정조가 과거 급제자 명단에서 윤명렬을 삭제한 것을 두고 원상회복하도록 하며 한 말이다. 윤명렬은 삼일제에서 급제하여 정조가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도록 했다. 그런데 당시 재상이었던 채제공이 품위도 없고 얼굴도 못생겨 임금을 가까이 모실 수 없다고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할 것을 주청하였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까닭이 있었다. 당시 채제공의 종질이 과거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되는 일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윤명렬의 친족인 윤시동의 잘못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채제공이 잘 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윤명렬은 다시 합격자 명단에 들게 되었다.


어떤 점쟁이가 여러 재상들의 재식들과 함께 점을 보는데 윤명렬을 향해서 말했다.

 

“선비께서는 가난하고 궁색한 형상이니 함께 논의할 필요조차 없소.”

 

그 말을 들은 윤명렬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와 버렸다. 다음날, 점쟁이가 윤명렬의 집을 찾아왔다.

 

“당신은 매우 존귀한 상입니다. 특히 등허리의 상은 말할 것도 없이 귀중한 상이오. 내가 세 꾸러미의 돈을 당신에게 줄테니, 한 꾸러미는 술과 안주를 마련할 비용이며, 두 꾸러미는 지금 당장 양식과 땔감을 사는데 사용하시오. 그리고 뒷날 틀림없이 존귀하게 될 터이니 20년 뒤에 되돌려 주는 것으로 3천 냥짜리 어음을 하나 만들어 주시오.”

 

윤명렬이 흔쾌히 허락했다. 뒤에 윤명렬이 연경으로 사신을 갔다가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오자 강원 감사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점쟁이가 찾아와 어음을 내보이며 약속을 말하자 윤명렬은 즉각 돈을 내주었다. 윤명렬의 부인도 얼굴이 못생겼는데, 네 아들을 두었다. 윤명렬이 장난삼아 아내에게 말했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부인의 그런 얼굴로 시집 갈 수 없었을 것이고, 나의 이 얼굴로도 부인이 아니었다면 장가들 수 없었을 것이오.”

 

윤명렬의 아들 윤치승은 판관, 윤치응은 목사, 윤치의와 윤치영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