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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가양리수락영당(米院面佳陽里水落影堂) 본문
가양리에 위치하고 있다
1898년(광무2) 이제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영당이다
익재영정(益齋影幀)은 원나라 화가 진감여가 그린 고려 말의 문신 익재 이제현의 전신 초상화이다.화면 상단에 적혀 있는 화기에 의하면, 이제현이 33세 되던 해인 1319년에 충선왕을 모시고 중국 절강성의 보타산 사찰에 강향하기 위해 갔을 때, 왕명으로 항주 최고의 명수인 진감여를 불러 그리게 하고 당시 석학이었던 탕병룡에게 찬문을 짓게 했다고 한다.
현재 전남 장성군의 가산서원(佳山書院)과 충북 청원군의 수락영당(水洛影堂), 전남 강진군의 구곡사(龜谷寺)에 수장되어 있는 이제현상의 범본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 영정은 많은 부분이 보수되기는 했지만, 원작의 형식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에 영향을 미친 원나라 초상화법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이제현(李齊賢, 1287년 ~ 1367년)은 고려의 시인·성리학자이다.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의 아들이다.
생애 [편집]
1301년(충렬왕 27) 나이 15세로 성균시에 장원급제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여 환로에 들었다. 이해에 당시 대학자며 권세가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308년 예문 춘추관에 들어갔다.
1314년 충숙왕 때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하였다. 그 해 원나라에 가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을 세우고 성균악정(成均樂正)에 이른 이제현을 부르자, 연경에 가서 원나라의 명사 요수(姚邃)·염복(閻復)·조맹부 등과 교우하여 학문이 더욱 심오해졌으며, 그때 진감여(陳鑑如)가 이제현의 초상화를 그리고 원나라의 석학 탕병룡(湯炳龍)이 찬(贊)을 썼는데, 그 필적과 그림이 대한민국의 국보 제110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충선왕이 모함을 받아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벌을 받아 유배되자 잘못됨을 밝혀 풀려나오게 하였으며, 그 후에도 충숙왕이 모함을 받아 두 차례나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에도 원나라 조정에 글을 올렸다. 충선왕이 서번(西蕃)에 귀양 가자 그곳에 따라갔으며, 밀직사사(密直司使) 첨의평리(僉義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삼사사(三司事)를 역임하였다.
1323년(충숙왕 10) 유청신(柳淸臣)·오잠(吳潛) 등이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고려에 성(省)을 설립하여 원나라의 제성(諸省)과 동등하게 하려고 청하자(입성론) 이제현은 도평의사사에 글을 올려 고려 400년의 토대가 이로 말미암아 무너진다고 간곡히 호소하여 이 문제를 철회케 하였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정승 조적(曺頔) 등이 심왕(瀋王) 고(暠)와 꾀하여 모역(謀逆)하다가 사형된 뒤 그의 무리가 연경에 많이 남아 있어 인심이 매우 동요하자 이제현은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건너가 잘 절충하였고, 충목왕이 즉위하자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피봉되었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즉위할 때 우정승에 임명되고 정동성사(征東省使)를 맡자, 원종공신(元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자기보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을 시기함을 알고 그 벼슬을 내놓았으므로 후에 조일신의 난 때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 후 우정승을 두 번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있다가 1357년(공민왕 6) 벼슬을 떠났다.
만년에는 집에서 지내면서 공민왕의 명을 받고 실록을 편찬하고, 종묘(宗廟) 위패(位牌)의 서차(序次)를 정하였다.
죽은 뒤에 공민왕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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