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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수산리 만주공묘갈(米院面 壽山里 晩洲公墓碣)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수산리 만주공묘갈(米院面 壽山里 晩洲公墓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6. 7. 10:14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 호는 만주 자는 완구 이조참의를 지낸 홍석기(1606-1680)의 묘소에 이르는 초입마을인 미원면 수산리 너더리마을(수산1리) 남양홍문 충효각옆에 세워져 있는 묘비이다.비석은 권상하가 찬하고 홍순곤이 선하였으나 당대에 세우지 못하고 그의 사후 약 250년이 지난 1928년에야 건립하였다.



1936년의 홍수로 인하여 묘비가 떠내려가면서 옆부분이 파손되었다고 전해지며 파손된 부분을 새로 조각하여 끼워넣은 흔적이 보안더,

묘비는 팔각대석위에 비신을 세우고 위의 팔각지붕 모양의 개석을 올렸다.

그의 묘소는 이 묘비에서 약 1.5키로 떨어진 마을 뒷쪽 산능선상에 있어 이 묘비는 신도비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본관은 남양()이며, 자는 원구(), 호는 만주()이다. 청주 판교리(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수산리)를 근거지로 한 남양홍씨 집안의 인물이다.
아버지는 홍이정(), 할아버지는 홍순각(), 증조할아버지는 홍해(), 외할아버지는 남충원(), 장인은 김발이다. 아들로 홍일우() 등 4형제를 두었고, 동생으로 홍석주()가 있다.

1627년(인조 5) 진사시에 합격하여 장릉참봉()이 되었고, 1641년 호조좌랑으로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병조좌랑을 거쳐 곧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645년에는 만언소()를 올려 시사()를 논하다가 해운판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654년(효종 5)에 예조정랑으로 다시 기용되었는데 문신정시()에 급제하여 인동부사(使)로 임명되었다.

1656년 성천부사(使)·양재찰방()을 거쳐, 1659년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그곳의 문교()에 힘을 기울여 사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1665년(현종 6) 해주목사, 1667년 서천군수, 1669년 영광군수를 역임하였으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그 뒤 남원목사로 임명되어 임기를 마친 뒤 청주 판교리(현, 청원군 미원면 수산리)에 자리잡고 후운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여생을 보냈다. 후운정은 고운() 최치원()이 세상의 명리()를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산 높은 뜻을 잇기 위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는 이곳에 머무르면서 화양동()에 있던 송시열()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시사를 담론하기도 하였다.

구서봉()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만주집()』과 『존주록()』이 있는데, 만주집은 그의 후손들이 1793년(정조 17)무렵에 간행한 8권3책의 유집()이다.청주에 있는 망선루()의 중건상량문을 쓰기도 한 그는 항상 나라를 걱정하였고, 세상사가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늘 시를 써서 울적한 심정을 표현하여 그의 시가 수백편이 된다고 한다. 병중에서도 나라를 걱정하여 많은 상소문을 지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효로 효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청주읍지에 「수락당()」 시가 수록되어 있다.

천지간에 세 칸 집 강산()에 술취한 한 노인 있네.
스스로 마땅히 세월을 잊어버렸는데
하필 서동(西)을 묻는고?
새는 맑은 호수안으로 내려앉고
구름은 푸르름 가운데 생겨나네.
손님이 와서 붓을 적시는 것으로 인연되니
시구()가 공려하지 못하여 부끄럽네.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수산리 산5번지에 묘소가 있는데 상석, 향로석, 망주석 등이 있다. 권상하()가 찬하고 홍순곤이 쓴 그의 묘비가 있는데 당대에 세우지 못하고 1928년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묘소에서 약 1.5㎞ 가량 떨어진 남양홍문 충효각 옆에 세워져 있는데 신도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1799년(정조 23)에 아버지 홍이중()과 함께 충효로 정려되었으며, 청원군 미원면 수산리 46-6에 홍이중·홍석기() 부자의 충효각이 있다.



미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