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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운교리 함벽정(米院面 雲橋里 涵碧亭)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운교리 함벽정(米院面 雲橋里 涵碧亭)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6. 15. 14:42

 

 

소재지는 미원면 운교리 156번지입니다.함벽정이 세워진 구룡천은 미원천 대덕리 좌구산(658m) 아래에서 발원해 운교리, 구방리를 거쳐 청천면 청천리로 흘러내려간다

 

 

 

구룡천은 운교리, 기암리, 구방리로 흘러간다. 운교리라는 행정명칭은 자연마을인 운곡과 석교에서 한자씩 따 만들어졌다. 운교리는 산촌 생태마을로, 보건진료소가 있다.

 

함벽정(涵碧亭)은 ‘젖을 함’(涵)에 ‘푸를 벽’(碧)을 써 ‘푸름에 젖은 정자’라는 뜻이다. 1630년(인조 8) 사과()를 지낸 함벽 신중흡()이 미원면 운교리() 구룡천 개울가에 세운 정자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66년 미원면 운교리 구룡천 옆 산 중턱으로 옮겨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간에 마루를 깔고 사방에 개다리 난간을 둘렀다. 신현모()가 쓴 함벽정()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전북대학교 박물관 - 기타 - 시문기록(禹模가 作成한 申上舍石軒涵碧亭韻)

우모(禹模)가 작성한 신상사석헌함벽정운(申上舍石軒涵碧亭韻)이다. 석헌은 운(韻)에 이어 소개된 함벽정 창건의 내력으로 미루어 신창휴(申昌休)로 추정된다. 아마 석헌이 그 부모를 위하여 함벽정을 지은 것을 축하하며 그 족종(族從)인 우모가 운(韻)을 읊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날 전하는 함벽정은 평안도 평양의 부벽루 옆에 있는 함벽정과, 전북 익산시 왕궁면의 함벽정, 그리고 충북 청원군 미원면 운교리에 있는 함벽정 등이 있다. 이 중 왕궁면의 것은 1920년에 송병우가 지은 것이며, 청원군의 것은 인조 8년(1630)에 고령신씨 가문의 신중흡(申仲洽)이 지은 것이다. 위의 운에 나오는 함벽정이 이 중 어떤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함벽정에서 바라보이는 운교리의 모습입니다

멀리 산 밑으로 보이는 곳에 함벽정을 지은 신중흡의 묘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함벽정기 번역문】
십 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음만 같은 것이 없고 백 년의 계획은 덕(德)을 심음만 같은 것이 없다. 나무를 심는 것은 바라는 바가 가까이에 있는 것이요 덕을 심는 것은 바라는 바가 멀리 있는 것이니, 가까운 것을 급히 하고서 그 먼 것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상당(上黨) 동쪽에 상운(上雲)이 있고 상운 사이에 샘은 맛좋고 땅은 비옥하여 초목이 무성하니, 세상에서 숨고자 하는 사람이 자리잡을 만한 곳이다. 우리 집안 수십 호가 그곳에 거처하며 농상(農桑)에 힘쓰니 가족을 먹이기에 넉넉하였고, 또한 수십 년 전에 나무를 심어 수만금을 얻었다. 백우(佰雨)와 복식(福植)이 정휴(井休)․ 두휴(斗休)와 상의하여 선조의 묘를 보수하고 비를 세우고, 그 나머지로 정자를 세울만한 상쾌한 땅을 골라 정자를 세우니 이것은 대저 선조를 받들고 후손을 여유롭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정자를 지음에 비록 규모가 크고 웅장하지는 않더라도 기주, 주유, 단확은 시인 묵객이 쉴 만하였다. 백우가 판각에 더욱 뛰어나고 봉구(鳳求)가 또한 공급에 정밀하여, 규구와 준승은 백우가 지휘한 것이요 단청과 농유는 봉구가 채색한 것이다. 정자의 전후좌우로 유죽이 빽빽하여 아침 햇살과 저녁 그늘에 취벽(翠碧) 사이에서 함영(涵泳)하니 그 때문에 함벽(涵碧)이라 명명하였다. 정자에 오르는 자 한 번 둘러봄에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게 할 만하다. 대저 만물의 훼폐에는 운수가 있고 일의 흥하고 폐함에는 때가 있다. 어제는 풀이 우거져 황량했던 터가 오늘 이와 같
음을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기와장과 기둥이라도 어찌 만물과 부합하고 운수와 때가 회합하지 않음이 없겠는가?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얻지 못하면 기뻐할 수 없고 재물이 없으면 기뻐할 수 없으니, 재물을 얻게 되면 옛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하였다.”고 하였다. 이제 이와 같은 축조의 법도가 있더라도 재물이 없으면 정자가 있을 수 없으니, 재물을 일으키는 길은 나무를 심은 뒤이기 때문에 옛 말에 십 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음만 같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비록 축조의 법도가 있고 재물이 많더라도 그 사람이 없으면 운영할 수 없다. 우리 신씨는 고려말에 처음 현달하여 덕을 쌓은 것이 수백년에 그 아름다움이 헤아릴 수 없으며, 충효가 서로 전하고 헌면(軒冕)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 때문에 백 년의 계획은 덕을 심음만 같은 것이 없다고 한다. 공사가 끝나고 낙성함에 종친이 모두 모여 종일토록 서로 기뻐하였다. 정자를 지은 사람은 백우요,협찬한 사람은 묵천(墨泉)과 존식(存植)이며, 일을 주선한 사람은 정휴와 두휴와 복식이요, 색을 칠한 사람은 봉구요, 정자를 명명하고 기문을 지은 사람은 나이다. 이로 인해 그 일을 위와 같이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