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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면 행촌리 호소사열녀각(延豊面 杏村里 扈召史烈女閣)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연풍면 행촌리 호소사열녀각(延豊面 杏村里 扈召史烈女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7. 16. 10:30

 

 

소사(召史)라 함은 양민의 아내 혹은 과부를 일컫는 말로 흔히 성(姓) 밑에 붙여 부릅니다.양반가의 아녀자들에게는 성뒤에 씨(氏)자를 붙입니다.(예 - 淳昌趙氏)

조선시대 여성은 노비층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이름을 공식적인 문서에 기재하지 않았는데, 결혼한 뒤에는 구분하기 위해 특별한 지칭어가 주어졌다.양반 여성은 성씨 뒤에 씨(氏), 중인 여성은 성(姓), 평민 여성은 소사(召史)라는 용어를 붙여 신분 또는 계층을 구분했습니다.

 

 

 

 

이근립(李根立)의 처 호소사(扈召史)1636년(인조 14)  연풍고을 관리로 있던 이근립은 군량미를 거두어 강화도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호씨 부인은 풍문을 들어 정묘호란 이후 또 호란이 일어날 것을 짐작하고, 남편의수천 리 원정길이 심상치 않을 것을 느끼어 남편이 입고 갈 옷에 자기만이 알아볼 수 있는표식을 해 입혀 보냈다. 그녀의 짐작대로 그 해 겨울에 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세자와 빈궁이 모두 적의 손에 잡혔다는 기막힌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호씨 부인은 남편의 안위가 걱정되어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비장한 결심을 하고 천리 길 낯선 땅 적군이 들끓는 전쟁터로 남편을 찾아 나섰다. 고생고생 끝에 강화도에 이르러 입혀보낸 의복의 특징으로 남편을 찾으니 남편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 길로 다시 고생을 무릅쓰고 남편의 시신을
운구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연풍면 유상리 요동 뒷산에 안장하였다. 그 후에 정숙하고 현명했던 그녀의 인품에 눈독을 들이던 근처의 무뢰배가 야밤을 틈타 그녀를 겁탈하려고 하였는데그녀의 극렬한 저항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망갔다. 이에 호씨 부인은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 마침내 소복 차림으로 남편의 묘소 앞에 나아가 통곡한 후 자결하였다. 이사실을 안 관아에서 호씨 부인의 시신을 거두어 죽은 남편의 무덤에 합장하고 그들 부부가
살던 연풍면 행촌리 입구에 열녀각을 세웠다.

 

 

 

 

 

 

조선시대부터 문신文身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종의 자신들만의 알고있는 표식을 하여 유대관계를 조성하든지 아니면 전쟁시 나중에 시체수습을 위한 징표로도 사용했다고 합니다.조선조때 전쟁이 일어나면 집집마다 징집되어 나가는 남편이나 아들에게 문신을 새겨 후에 판별을 용이하게 하였다고 합니다.몸에 새기는 문신은 어찌보면 힘 없던 민초들의 아픔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호소사열녀각 안에는 열녀율생이근립처호소사지정려(烈女律生李根立妻扈召史之旌閭)라고 적혀있는 편액이 걸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