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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성면 문박리 신교석추모비(琅城面 文博里 申敎錫追慕碑) 본문
낭성면 문박리에 있는 신교석의 추모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은사신공교석추모비(恩師申公敎錫追慕碑)리고 적혀있으며 1999년기유년5월에 낭성국교19회-24회졸업생일동의 이름으로
당시 교사로 많은 인재를 길러낸 신교석을 추모하여 세운 비석입니다.
문박리(文博里)는 가래산(加來山) 남쪽에 위치하며, 대부분 구릉지이다. 서쪽에 호정내가 흐르며, 고미디골, 동녁골 등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안골, 재실마을 등이 있다. 안골은 재실마을 안쪽에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고, 재실마을은 재실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낭성면의 가양리,문박리등에는 아주신씨들이 대성을 이루며 많이 거주하고 있는 듯 하다.
뒷동산 잣나무 밑에 대롱대롱 맺힌 이슬은 부엉 부엉 부엉이 눈물
오늘밤도 부엉이 운다 부엉부엉 슬피운다 또 눈물 쏟아 이슬맺으려고...
신교석이 지어 남긴 동요가 지금도 선생의 낭낭한 목소리에 섞여 울려퍼지는 듯 하다.
추모비의 뒷면에는 그간의 신교석의 행적이 쓰여있다.
선생은 아주인으로 청주상업학교 2년을 중퇴하고 잠시 평양광업소에 취업하였다가 1944년 11월 27일 청주사범학교 연구과를 수료후 청주국교 낭성국교 청주사범부속국교교사로 근무하셨다. 그 중에 1945년 10월부터 1948년 7월까지 낭성국교에서 베푸신 교육자로서의 헌신적인 교육열은 어린 꿈나무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그 때 5-6학년의 제자들은 모두가 천재적인 스승의 지성에 감화되어 상급학교에 대거 진학하였다. 특히 역사교육에 밝으셔서 해방직후의 열악한 교육환경 아래서도 우리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민족사관을 심어주셨으니 졸업후 진학을 하지 못한 제자들에게도 공부는 평생해야한다고 격려해주셨다.선생의 뜨거운 사랑과 창의력은 온지역에 전파되어 미원국교교감에 발탁되어 영전하셨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게 선생께서는 당시 혼란한 시국으로 인하여 조천하시니 참으로 아까운 일이었다. 선생은 1924년 9월5일에 태어나 1949년 8월1일에 소천하시니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다. 청상의 수절로 가정을 이끌어가시는 사모님과 여러 자제들의 참으로 고달픈 삶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살아온 한고을의 제자들은 무언의 안타까움이 있었다. 이제 자제들은 자기직분에 충실한 사회인이 되었고 손자들은 선생의 가문을 이어갈 청장년으로 성장하였다.
선생께서 타계하신지 50주년을 맞아 스승을 그리는 제자들의 정이 추모비로 승화되었으니 사제간의 끈끈한 미담을 이 비석에서 볼진저 스승께서 지어 남기신 낭낭한 음성의 노래는 길손의 발길마저 눈물로 멈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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