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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읍 삼청리 자점방죽(周德邑 三淸里 자점방죽)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주덕읍 삼청리 자점방죽(周德邑 三淸里 자점방죽)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9. 13. 14:21

 

 

청주에서 충주를 가다보면 주덕읍내 못미쳐 만나는 연못입니다.

능골소류지라고 불리우는 연못인데 지금은 실로암낚시터라 하여 유료낚시터를 바뀌였습니다.

이 소류지에 이름은 자점방죽이라 불리우며 구전되어 내려오는이야기가 있습니다.

 

 

 

삼청리 갈림길 옆에 저수지가 하나 있는데 김자점이가 호화 별장을 짓고 왕래했다는 집터인데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리자 이 집을 헐어 내고 못을 파서 그 집의 명기를 말살시켰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못물은 한 번도 맑아 본 일이 없다고 하며 김자점의 부정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자점(1500(선조21-1651(효종2)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김억령(金億齡)이며, 아버지는 현감(縣監) 김탁(金琢)이다. 성혼(成渾)에게 수학하였다.

음보로 출사해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논의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 때에 대북 세력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

처음에 최명길(崔鳴吉)·심기원(沈器遠)과 함께, 사돈 관계에 있는 이귀(李貴)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1622년(광해군 14)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 등과 연결되었다.

1623년 3월 군대를 모아 이귀·김류·이괄(李适) 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서 궁궐로 진격해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켰다.

인조 즉위 후 박홍구(朴弘耉)·조정(趙挺) 등 광해군 때의 정승들이 인사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막고, 이귀가 주로 인사를 담당할 수 있게 하였다.

반정 직후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 휘하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가 호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반정 공신인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공신녹훈을 전후해 반정의 두 주역인 김류와 이귀가 서로 대립하자, 이후 김류 쪽에 가담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옥에 있던 기자헌(奇自獻) 등 40여 인의 인사들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죽이자고 주장하였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했고, 순검사(巡檢事)·임진수어사(臨津守禦使)에 임명되었다. 1630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1633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1636년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 체계를 바꾸는 등의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兎山)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도원수로서의 책임을 지고 먼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 이후 공신 세력의 권력 추구와 패전에 대해 심한 공격을 하는 일반 사류들에 의해 계속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반청론자(反淸論者)들에게 염증을 느낀 인조의 후원으로 1639년에 고향으로 풀려나고, 이듬해에는 강화부윤·호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김류와의 제휴를 바탕으로 1642년 병조판서, 1643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같은 해 우의정 및 어영청도제조에 오르고, 진하 겸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1644년에는 경쟁 세력인 심기원 등을 역모 혐의로 도태시키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사은 겸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부분의 공신 세력가들이 죽거나 은퇴하고 일반 반청 사류들은 인조에 의해 거부되는 상황 속에서, 1646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1645년에는 숙원 조씨(淑媛趙氏)와 결탁해 인조의 의구심을 받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죽이는 데 가담한 듯하다. 이듬해에는 세자빈 강씨(姜氏)에게 인조 시해 혐의를 씌워 사사하게 한 뒤,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축출하고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였다. 또 인조와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자신의 손자인 김세룡(金世龍)을 혼인시켜 궁중과 유착하였다.

한편으로 청나라 사신이나 역관 정명수(鄭命壽) 무리들과 결탁해 청나라의 후원을 얻어 권력의 기반을 삼았다. 1646년 청나라가 포로가 되었던 임경업(林慶業)을 보내오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

인조 말년에는 신면(申冕) 등을 무리로 거느려 낙당(洛黨)이라고 지목되었으며,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의 무리와 대립하였다.

1649년 거의 유일한 후원자인 인조가 죽자 새로 즉위한 효종은 즉시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김상헌(金尙憲) 등을 불러들였고, 이들의 공격에 의해 1650년(효종 1) 홍천에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 역관인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청나라에 새 왕이 옛 신하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청나라가 즉시 군대와 사신을 파견해 조사했으나, 이경석(李景奭)·이시백(李時白)·원두표 등의 활약으로 그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에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 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김익(金釴)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해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宋浚吉)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가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복주당하였다.

김자점의 무리인 김응해(金應海)·기진흥(奇震興)·이파(李坡)·심지연(沈之演)·황헌(黃瀗) 등도 파직당하거나 교체되었다.

문과 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의 권력 추구, 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 관계, 청나라에 대한 매국 행위 등 당시 사림 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해 인조대 이후로 오랜 세월을 두고 비난을 받았다.

 

 

 

 

 

주덕읍 소재지인 신양리에서 음성으로 향하는 국도를 통해서 약 1km 남쪽에 이르면 좌측으로 삼청리 ‘농말’로 들어가는 국도변 입구에 널따란 저수지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점(自點)방죽이다. 농말과 가리봉 금곡광산 쪽으로 미락골로 들어가는 삼각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방죽은 그 옛날 권좌에 앉아 호령했던 조선 중엽의 간신 김자점과 연관 있는 것으로 흥미를 돋운다.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김자점이 영의정직에 있을 때 충주고을이 은거지로 좋다는 것을 알고는 길지를 수소문 하여 보았다. 그래도 길지를 고르던 중 어래산 기슭에 조용하고 교통이 편리한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 술자로 하여금 좌향을 알아보라고 했다.
명을 받은 지관이 현지에 나와 보니 요도천 지류를 좌측으로 하고, 우측으로 능말·배나무골을 안고 있고 옥녀봉을 바라다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얼핏 보기에는 명당임을 방불케하였다. 그러나 북쪽이 허하고 섯밭재 고개가 후부우록(後部右麓)을 뚫어 천수를 못할 자리였음을 알았다. 그 술자는 죽은 임경업 장군과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그곳이 길지라고 답서를 올렸다. 이에 김자점은 크게 좋아해서 이곳에 택지를 잡아 호화별장을 세워 자주 이곳에 와서 정양을 했다.그러나 운이 다한 그는 그가 수많은 충신을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인 것처럼 그도 역신이라는 죄명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평소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별장에 몰려들어 호화별장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영혼마저도 살아나올 수 없게 커다란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놓았다는 것이 바로 오늘의 자점방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명당자리가 못으로 변하고 난 뒤 오랜 시일이 흐른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방죽물이 맑아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청명한 날이나 장마가 지난 후나 한번도 맑아본 일이 없는데 이것은 생전에 김자점의 마음이 밝지 않고 옳지 못한데서 그와 같이 물이 흐리기만 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