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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금성대군신단(榮州 錦城大君神壇) 본문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제단입니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榮州錦城大君神壇)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도호부사 이보흠(李甫欽) 등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제단이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은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잡게 된다. 그리고 단종을 지지하던 금성대군을 제거하기 위하여, 한남군 이어(李), 영풍군 이전(李瑔), 영양위 정종(鄭悰) 등과 집에서 사연(射宴)[활쏘기 시합]한 것을 구실로 삼아 삭녕으로 유배를 보냈으며, 얼마 후 광주(廣州)로 유배 장소를 옮겼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때 금성대군 역시 경상도 순흥도호부로 위리안치되었다. 순흥도호부에서 금성대군은 순흥도호부사 이보흠과 함께 지역 사족들을 모아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단종 복위를 시도한 금성대군은 1457년 10월 21일에 사사 당하였고, 이보흠에게는 장(杖) 100대, 유(流) 3,000리의 형벌이 내려졌다. 이후 이보흠은 박천군으로 유배되었지만, 얼마 후 교살당하였다.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 역시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으며, 결국 영월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순흥도호부는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을 도운 지역이라고 하여 혁파된 후, 인근 군현에 분속 되었다.
200여 년이 지난 1681년(숙종 7) 단종의 신원이 이루어지면서, 대군(大君)에 추봉되었다. 1698년(숙종 24)에는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혁파되었던 순흥도호부 역시 1683년(숙종 9)에 복설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719년(숙종 45) 순흥도호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숙종의 허락을 받아 그 유허지에 금성대군 신단을 설치하였다. 1742년(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단소를 정비하였으며, 1980년 제청(祭廳)과 주사(廚舍)를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은 제청 공간과 단소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의 사주문을 들어서면 주사·제청 등 제청 영역과 단소 영역이 동북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제청은 정면 4칸 반, 측면 4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ㄱ’자형 집으로 건물 양쪽 끝에 ‘ㄴ’ 자로 담장을 설치하여 안뜰을 만들고 서쪽 담에 일각문을 내었다. 서향한 3칸 우단에 온돌방을 두고 대청 좌단 앞쪽에 남향하여 2통칸과 1칸의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그 앞에 긴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주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ㄷ’자형 집으로 일각문을 낸 동쪽 담 양단을 ‘ㄷ’ 자로 꺾어 건물과 연접시켜 안마당을 형성하였다.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익사 1칸과 온돌방을 두었으며, 오른쪽 익사 온돌방 앞에 부엌 1칸을 두었다. ‘금성단(錦城壇)’이라 편액된 삼문을 들어서면 단소가 있다. ‘품(品)’자 형태로 상단은 금성대군, 좌단은 이보흠, 우단은 순절의사의 단이 설치되어 있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 왼쪽에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가 세워져 있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은 1993년 11월 30일 ‘금성단’이란 명칭으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2월 31일 사적 제491호로 승격되면서 명칭도 ‘영주 금성대군 신단’으로 바뀌었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에서 북서쪽으로 약 420m 떨어진 곳에 금성대군 위리안치지가 있다. 『세조실록(世祖實錄)』에는 “그 고을의 수령에게 미리 거처할 곳을 수리하게 하되, 난간·담장과 문호를 될 수 있는 대로 높고 견고하게 하고, 내려간 뒤에 사람에게 교대로 지키게 하여, 외간 사람들과 서로 통래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하여, 당시 유배된 가옥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이후 금성대군 위리안치지는 폐허가 되었다가 1991년 돌로 우물 모양의 구덩이를 조성해 놓았다.
또 영주 금성대군 신단 인근에는 ‘충신수’라 불리는 압각수(鴨脚樹)가 자라고 있는데, 순흥 고을의 흥망성쇠와 같이한 경이로운 이력을 가지고 있다. 『재향지(梓鄕誌)』에 따르면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금성대군은 사사되고, 순흥도호부 역시 폐부가 되었는데, 이때 나무 역시 말라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노인이 지나가다가 말하기를 “흥주(興州)[순흥] 고을이 폐해져서 은행나무가 죽었으니, 은행나무가 살아나면 흥주가 회복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에 감개한 순흥부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전송해 왔는데, 1681년 봄에 비로소 은행나무에 새 가지가 나고 잎이 퍼지더니, 과연 1683년 순흥도호부가 복설 되었다고 한다. 현재 압각수는 경상북도 보호수 제4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령은 1,200년, 높이는 30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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