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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보면 미륵리 미륵대원지(水安堡面 彌勒里 彌勒大院址) 본문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절터이다.
미륵대원지는 중원 미륵리 사지 발굴 조사 중 옛 미륵리 안말마을이 있던 자리에서 확인·조사된 사원 터로서, 대규모 건물지가 동·서·남·북으로 회랑처럼 길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미륵대원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미륵대원(彌勒大院)’으로 추정된다.
미륵대원의 존폐 시기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연(一然)에 의하여 『삼국유사』가 저술되었던 고려 충렬왕대에 이르기까지 존속하고 있었던 듯하다. 『삼국유사』권1, 왕력(王曆) 1의 신라 아달라니질금(阿達羅尼叱今) 항목에, “계립령은 지금 미륵대원의 동령이다(鷄立嶺今彌勒大院東嶺是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원(院)의 경영이 이루어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건물은 원우(院宇)라고 했다. 원은 지방통치와 교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시대에는 원이 사원에 부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서로 동일시되기도 했으며, 관리는 승려들이 맡아하기도 했다. 이러한 원들은 주로 교통상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어 교역의 중심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보면 개경과 가까운 곳에 도적이 자주 출몰하자 인명과 통과물품을 보호하기 위해 원을 세운 듯하다. 원의 관리는 각 지방에서 맡았으나, 실제로는 소홀함으로 인해 조폐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후 조선시대 들어 1392년(태조 1) 9월에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의 상소로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원이 수리·건설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원우는 고려시대의 사원 또는 선원(禪院)이 원으로 전환되거나, 개인소유의 주택 또는 누정(樓亭)을 개조한 것이 많았다. 그외 관가 또는 개인이 주관해 원우를 신축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은 공무를 위한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상고(商賈)나 여행자의 숙식소로 존재했다. 또한 국왕이 지방을 순시할 때나 피난길에 이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각도 관찰사가 도내의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원에서 점심을 먹거나 마필(馬匹)을 교체했으며, 신·구 감사가 도계(道界) 부근의 원에서 교대하기도 했다. 이 원우의 관리는 서울 성저(城底:도성 10리 이내의 거리)의 원은 5부(部)에서, 지방의 원은 수령이 부근에 사는 주민을 원주로 삼아 이를 담당하게 했다.
그리하여 한성부와 관찰사가 이를 감독하여 수령의 근태 여부를 조사해 그들의 인사자료로 삼기도 했다. 한편 역원(驛院)의 대로(大路)·중로(中路)·소로(小路)는 1445년(세종 27) 국용전제상정(國用田制詳定) 때 주(州)·부(府)·군(郡)·현(縣)의 대로·중로·소로와 함께 규정되었다. 대로는 서울에서 죽산(竹山)·직산(稷山)·개성부(開城府)·포천(抱川)까지였다.
이곳은 5호(戶)를 원주로 임명했다. 중로는 죽산에서 상주(尙州), 진천(鎭川)에서 성주(星州), 직산에서 여산(礪山), 개성부에서 중화(中和), 포천에서 회양(淮陽), 서울에서 광주 도미진(渡迷津)까지로 3호를 원주로 임명했다. 소로는 대로·중로 외의 나머지 도로이며, 2호를 원주로 삼았다. 그런데 〈경국대전〉에는 중로의 여산이 전주(全州)로, 광주 도미진이 양근(楊根)으로 바뀌었다.
원주들은 잡역을 면제받았으며, 운영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원전(院田)을 지급했다.
고려시대인 1391년(공양왕 3) 10월에 대로에는 2결, 중로 1결 50부, 소로 1결을 주었다가 1445년에 각기 1결 50부, 1결, 50부씩을 지급했던 것이 〈경국대전〉에는 1결 35부, 90부, 45부로 축소되었다. 한편 서울 성저의 동쪽·서쪽·남쪽 지역에는 보제원(普濟院)·홍제원(弘濟院)·제천정(濟川亭)·사평원(沙平院) 등 4개의 큰 원이 있었다.
이러한 원은 세조 때 세워졌다. 보제원은 동대문 밖 3리(三里) 지점에 위치하며, 3월 3일과 9월 9일에 기로(耆老)와 재추(宰樞)를 위해 사연(賜宴)을 베풀던 곳이다. 그리고 홍제원은 사현(沙峴)의 북쪽 들에 있었고,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는 날에 머물며 옷을 바꾸어 입던 곳이다. 제천정은 한강의 북쪽 언덕에 위치해 한강을 유람하는 중국 사신이 맨먼저 들른 곳으로 고관들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이들이 날마다 모여들었다. 이곳은 한강의 도승(渡丞)이 관리했다. 마지막으로 사평원은 한강의 남쪽 모래언덕에 있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사평진(沙平津)이었다.
이곳은 날이 저물어 한강을 건너지 못한 나그네들이 유숙하던 곳이다. 이같은 원 중에서 특히 보제원과 홍제원에는 전 2결 50부를 지급했다. 그밖에 성저지역에는 남산 남쪽에 이태원(梨泰院), 전곶교(箭串橋) 서북쪽에 전곶원이 있다. 한편 서울에 기근이 들었을 때는 성저에 소재하는 원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해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휼하기도 했다. 원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차차 그 기능이 상실되어갔으며, 오히려 민간에서 운영하는 기관들이 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로 인해 차차 원은 쇠락하여 그 기능을 역에 넘겨주거나 주막 또는 주점으로 바뀌었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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