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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면 석성리 김한정충신각(北二面 石城里 金漢廷忠臣閣) 본문
이 충신각은 조선 고종 2년(1865)에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백면선생으로 의병을 일으켜 반란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된 충신 경주인(慶州人) 낙당(樂堂) 김한정(金漢廷, 1688∼1728)의 충절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충신각은 1960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충신문 편액을 걸었다. 이밖에 고종 24년(1887)에 김영목(金永穆)이 지은 "충각서(忠閣序)"와 고종 25년(1888)에 송근수(宋近洙)가 지은 "충려기(忠閭記)" 등의 기문판이 걸려 있다.
청원군 북이면 석성리 길가에 위치하고있다.
석성리는 본래 청안군 서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성리, 신하리와 석화리, 신상리, 죽계리, 상월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석화와 신성의 이름을 따서 석성리라 이름짓고 청주군 북이면에 편입되었다. 1952년 행정구역을 1구, 2구로 분할한 후 1885년 3구 분할 현재 의 행정 구역을 이루고 있다.
이인좌는 조선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본명은 이현좌(李玄佐)이다. 청주 송면 출신으로 전라감사 이운징(李雲徵)의 손자이며, 윤휴(尹鑴)의 손서(孫壻)이다. 동생은 이기좌(李麒佐)이다.
당색이 과격한 소론이었던 그는 영조(英祖)의 즉위로 소론이 정계에서 배제되자 정희량(鄭希亮), 이유익(李有翼), 심유현(沈維賢), 박필현(朴弼顯), 한세홍(韓世弘) 등 소론 과격파와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물러난 남인들과 공모하여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인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 무력으로 정권쟁탈을 꾀하였다.
스스로를 대원수(大元帥)라 자칭하고 1728년(영조 4) 3월 15일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에 진입,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1676~1728], 군관 홍림(洪霖)[1685~1728],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각처에 격문을 돌려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나누어주는 한편,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여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에 이르렀다.
이때 반란진압을 위하여 출동한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의 관군과 싸워 안성에서 패하자 죽산으로 도피하였으나, 계속적인 추격으로 산사에 숨었다가 신길만(申吉萬) 등 마을사람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해 3월 26일 친국에서 역모의 전모를 공술하고, 다음날 대역죄로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능지처참이 되었다. 이인좌 [李麟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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