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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성면 귀래리 신채호동상(琅城面 歸來里 申采浩銅像) 본문
낭성면 귀래리에 위치하고 있는 신채호선생의 동상입니다. 귀래리에는 신채호선생과 관련된 유물관과 함께 동상 그리고 영당과 선생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찾은날은 코로나로 인하여 유물관은 입장할수가 없었으며 동상과 함께 영당 그리고 무덤만 둘러 볼수 있었습니다.
신채호는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이다.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大德郡) 산내면(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열혈생(熱血生), 한놈, 검심(劍心), 적심(赤心), 연시몽인(燕市夢人) 등이다. 조선시대 신숙주(申淑舟)의 18대 손이 된다. 고령신씨(高靈申氏)의 일부는 연산군 무렵에 낭성과 가덕 지방에 낙향하여 살았는데, 상당산성 동쪽에 산다고 하여 산동대가로 지칭되기도 했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신채호의 주요 저서로,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신채호는 주로 고대사 연구에 치중하여 한민족의 기원을 밝히고, 주체적인 한국사를 정리하여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의 대표 저서 중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는 단군부터 삼국시대까지 서술하였고, 머리말에서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파악하였다. 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1931년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것을 1948년에 단행본으로 발행한 것이다. 신채호의 '조선사' 서술의 일부분이었으나, 그 연재가 상고사(上古史)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로 불리게 되었다.
신채호의 또 다른 저서인 <조선사연구초>에서는 민족이 지켜야 할 정신으로 낭가사상을 강조하였고, 낭가사상의 가장 대표적 인물로 묘청을 추천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하였다.
신채호(申采浩)[1880~1936]의 이름은 청년기까지 한자로 ‘寀浩’로 쓰다가 국외 망명을 전후하여 ‘采浩’로 바꾸었다.
신채호는 어려서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부터 한학 교육을 받았으며, 아홉 살에 『통감(通鑑)』전질을 해독하고 열 살에 행시(行詩)를 지을 만큼 총명하였다. 열두세 살 때에 능히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독파하여 신동이라 불리었다.
열여덟 살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집에 드나들며 책을 두루 읽으며 그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열아홉 살 때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 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이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김연성(金演性), 변영만(卞榮晩), 이장식(李章植), 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하였다.
이 무렵에 신채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협회 내무부 문서부에서 활동하였다. 스물두 살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1879~1922] 등과 개화와 자강의 교육사상을 펼쳤고, 스물다섯 살 때에는 신규식, 신백우(申伯雨)[1886~1959]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하여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스물여섯 살 되던 1905년 2월에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에 들어가 논설을 쓰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정간되어 퇴사하고 그 이듬해에 신채호는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申報社)에 들어가, 그 뒤 주필이 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더불어 그는 1907년 9월에 그는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여 정치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어 무단통치가 이루어지자 독립운동 기지를 국외로 옮기자는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신채호도 1910년 4월에 망명길에 올라 그 해 여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다. 여기서 그는 윤세복(尹世復), 이동휘, 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해조신문(海潮新聞)』의 후신 『대동공보(大東共報)』에도 관여한 듯하며, 이해 12월에 창설된 권업회(勸業會)에서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에 그는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였고, 문일평(文一平), 박은식(朴殷植), 정인보(鄭寅普), 조소앙(趙素昻)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1914년에는 윤세용(尹世茸), 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 회인현(滿州 奉天城 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朝鮮史)』를 집필 발간했다. 이 때 그는 백두산과 광개토대왕릉을 비롯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며 부여·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가 한국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구상하면서 1916년 3월에는 북경에서 애국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소설 「꿈하늘(夢天)」을 썼다.
1918년경부터 그는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우거하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였고, 그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해 7월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사임하였으며, 이어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에 대립되는 『신대한신문』을 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그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는데, 이 선언에서 그는 폭력에 의한 민중직접혁명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해 1월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創造派)의 맹장으로 활약하였으나, 개조파(改造派)와의 대립으로 5월 그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거주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그는 아나키즘 사상에도 심취했다.
1927년에 그는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면서 국외에서나마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1928년 4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대회에 참석하여 활동하는 등 그의 행동투쟁은 점점 거세어졌다. 그러다가 그는 그해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 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되었다.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21일 쉰일곱 살에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신채호는 평소 "내 죽거든 시체가 왜놈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띄워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아무도 모르게 그의 유해를 들여와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상당산(上黨山)[419m] 기슭 옛 집터에 암장하였다. 이때 만해 한용운이 돌을 깎고, 오세창이 글씨를 새긴 비석을 신백우가 몰래 세웠다.
독립운동가로서 신채호의 사상은 절대독립론, 무장투쟁론, 민족혁명론(민중직접혁명론) 등 세 가지 형태로 표현된다. 절대독립론은 3·1운동 후에 대두한 자치론, 내정독립론, 참정권론 등 일제와의 타협주의를 분쇄하는 데 큰 공헌을 하여, 비틀거리던 독립운동노선을 바로 잡아주었다.
무장투쟁론과 민족혁명론은 강도와 같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폭력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이 정당함을 가르쳐 주어 그 후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방법적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자·언론인·문인으로서 신채호의 사관은 그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의 초창기 사관은 소수의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영웅주의 사관이었으나, 그 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는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민족의 독립을 위한 것으로 귀결되므로 결론적으로 신채호의 사상은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朝鮮史)』를, 국사 연구에 노력하여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를,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썼던 것으로는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이순신전(李舜臣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등 많은 저서가 있다.
중편소설 「꿈하늘(夢天)」을 집필하였는데, 이는 일종의 환상적인 사상소설로서 그의 애국적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것이다.
첫째, 독립운동가로서 신채호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였다. 민족의 자강과 독립이라는 사상적 바탕 위에서 한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의 사상과 행동은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노선을 정립하고, 이후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방법적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역사학자로서 신채호는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 연구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려 하였고,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냈으며,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역사학은 우리나라의 근대사학 및 민족주의사학의 출발로서 평가되기도 하나, 민족주의사상의 역사연구에의 지나친 투영이 그의 역사이론 및 한국고대사인식을 교조적(敎條的)·독단적으로 이끌어갔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셋째, 작가로서 신채호는 번안과 여러 장르의 창작 활동을 통해 한국민족문학사를 세우는 데 하나의 디딤돌이 되었다. 그는 우리 신문학 운동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신문학 형성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또한 그의 주체적 문학 및 문학론은 조선조와 근현대 문학을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서구화된 근대, 억압된 근대에 맞섰다. 이러한 면을 볼 때 그의 문학은 우리의 민족문학적 위치를 굳건히 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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