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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외면 장갑리선정비군(山外面 長甲里善政碑群)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산외면 장갑리선정비군(山外面 長甲里善政碑群)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9. 12. 09:23

 

장갑리는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악, 벌말, 궉말, 새말을 병합하여 장갑리라 하였다.비석은 장갑리에 흩어져 있던 비석을 모아 한군데에 세워 놓았다. 일제강점기때의 비석이 대부분이다.

 

보은군 산외면 장갑리 장갑삼거리에 있는 공적비중에 좌측에서 다섯번째 있는 비석이다.비석에는 정삼품통정대부김규한선덕불망비(正三品通政大夫金奎漢善德不忘碑)라고 음각되여 있으며 비의 건립시기는 갑오년(1954) 시월십일로 음각되여 있다. 1910년 산외면 남악리에 살던 전 교관(敎官) 김규한(金奎漢)은 교육에 뜻을 두어 기금을 거출하고 동지들의 뜻을 모아 광흥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다.당시 신문에 이와 관련돤 광고가 게재되었는데 학교설립을 위한 취지문을 보면 여전히 유학의 영향력이 많이 남아있음을 알수가 있다. 교육에 뜻을 두어 초기에는 열심을 내고 하였지만 후에는 재정적인 빈곤과 일제의 방해등으로 하여 많이 힘들었으며 퇴락하였다. 그러나 지역주민들의 화합과 민족의식등에 고취에는 큰 힘이 되었다. 광흥학교의 발기인은 다 음과 같다.발기인(發 起 人): 김규한(金奎漢), 노봉수(盧 鳳 洙), 심성지(沈性 之), 이규항(李 圭 恒), 나일용(羅日容), 노치수(盧致 洙), 조의수(趙 義 洙), 김영염(金 永念), 서병하(徐丙夏), 노철수(盧哲洙), 나두용(羅斗容), 심능복(沈能復), 박영표(朴永杓), 나병학(羅柄學), 남계철(南啓喆), 박래현(朴 來鉉), 이정우(李正雨), 강만 수(姜晩秀), 서정두徐 廷 斗), 김일동(金壹東), 송기헌(宋琦憲), 조형식(趙馨 植), 이우갑(李愚甲), 이헌성(李憲誠), 강태현(姜泰鉉), 이지화(李智和), 김정한(金正瀚), 유덕기(柳 德 基), 송병기(宋 秉 企), 문 무엽(文 武曄), 조승하(趙昇夏)이다.


한말 어려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방책으로 지방의 유지나 지식인들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국가를 위한 방책이기도 했지만, 시대적인 사명이자 유행이기도 했다.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교육하면 다른 열강들처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 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은 일정한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교육에 관심을 가졌던이들에게 의병전쟁은 무모한 것이었고, 돈을 모아 학교를 짓는 것이 오히려 국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그러나 그들 또한 현실의 벽을 쉽게 넘지 못했다. 기세 좋게 시작한 새로운 학교들은 예외 없이 얼마 가지 않아 재정 위기에 처했고, 교육의 목표 또한 일제에게 침탈당하는 현실을 강조하기 어려워 현실 순응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개인의 역량을 쏟아부어 새로운 세대에게 희망을 걸었던 점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또한 이들의 노력이 지역에서 호응과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유추하건데, 근대로 접어드는 보은에서도 군민들 사이에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은군 산외면 장갑리 장갑삼거리에 있는 비석군중 좌측에서 네번째 위치한 시헤불망비이다.찹봉나상덕시혜불망비(參奉羅相德施惠不忘碑)는 89*30*12.5의 크기이다.앞면 좌우로는 시헤불망비를 세우게 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염봉정도(廉捧定賭)감성예속(感成禮俗)전멸두세(全滅斗稅)중구탄모(衆口歎謀)라고 적혀 있으며 비의 건립시기는 무진이월(戊辰二月)이라고 음각되여 있다. 1928년에 건립된 비로 당초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나 크게 훼손되어 1980년대 말 후손들의 의하여 오석으로 다시 세웠다. 나상덕은 1895(고종 32)~1949 │ 근대의 자선가로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윤옥(潤屋), 호는 국사(菊史)이다. 효자 나중경(羅重慶)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나채홍(羅采 弘), 아버지는 나일용(羅日容),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김수현(金秀鉉)의 딸이다. 부인은 벽진 이씨(碧珍李氏)로 이승복(李承福)의 딸이다. 종사랑으로 효덕전(孝德殿) 전의참봉 겸 성균경학원(成均經學院) 사예박사 (司藝博士)를 지냈다. 평소 심지가 굳고 확실하였으며 효우가 독실하였다. 또한, 소작인에게 도조를 깎아 주고 두세(斗稅)를 반감해 주어 주위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1928년 산외면 장갑리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산외면 장갑리 삼거리에 위치한 다섯기의 선정비중 세번째 송덕비이다. 이정우는 경주인으로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장갑리 구장및 면협의원을 지낸 인물로서 동네의 극빈자들을 동정하여 극빈자들에 대한 세금을 대납하였고 가뭄등으로 인하여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의 세금을 대납하였다. 이 비는 이정우의 구제및 구휼활동에 대하여 그 공을 인정하여 임진년(1952)에 동네주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송덕비로 추정된다.비의 크기는 전체높이 130 비면은 100*36*12.5이다.비의 전면에는 고문월헌이정우송덕영세불망비(顧問月軒李正雨頌德永世不忘碑)라고 음각되여 있다. 또한 옆에는 재년시량(災年施糧)누차휼빈(累次恤貧)수곡불염(收穀不歛)복의봉사(伏義奉仕)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정우(李正雨) 1886(고종 23)~1975 │ 근·현대의 독지가로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월헌(月軒)이다. 산외면 장갑리 출신이다. 본래 대지주로서 천성이 인자하고 매우 후덕하였다. 흉년이 들면 양곡을 대여해 주되 무이자로 환수하며 춘궁기에 절량한 사람에게 양곡을 주는 등 구휼사업에 힘썼다. 1941년 산외면 장갑리에 송덕비가 건립되어 있고 1959년 손수 건립한 월헌정(月軒亭)이 남아있다.송덕비 뒷쪽 동산에는 이정우의 후손들에 의하여 경주이씨종중묘원이 자리하고 있다

 

 

 

 

산외면 장갑리 장갑삼거리옆에 위치한 공적비중에 하나인 보은군수를 지낸 임혁재의 공적비이다.공적비의 주인공인 임혁재는 61.6.3~63.8.14일까지 2년 2개월 정도 보은군수를 지냈다. 보은군수를 지낸 임혁재의 공적비는 비석군을 바라보며 좌측에서 두번째 비이다. 공적비에는 군수임혁재검암교준공공적비(郡守任爀宰劒岩橋竣工功績碑)라고 음각되여 있다.아마도 군수재직시설에 군민들을 위하여 검암다리를 놓아준 군수의 치적을 기려서 준공공적비를 세운 듯 하다.

 

 

보은군 내북면 장갑리 삼거리에는 5기의 선정비가 있다. 이 비는 비석군을 바라보며 왼쪽 첫번째에 있는 비석이다.고문경주이공정우선영사업공적영세기념불망비(顧問慶州李公正雨先瑩事業功績永世紀念不忘碑)라 음각되여 있으며 이 비의 건립시기는 1971년이다.전체 135센티 비면은 93*33*17.5센티의 크기이다. 비석의 뒷편으로는 경주이씨가문의 선영이 자리하고 있다. 선영을 만들고 조림하고 가꾸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정우의 공적을 기린 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