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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읍 도순찰사민치상영세불망비(陰城邑 都巡察使閔公致庠永世不忘碑) 본문
향교 앞의 불망비에는 ‘도순찰사민공치상영세불망비(都巡察使閔公致庠永世不忘碑)’라 쓰여 있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공충감사를 연임했던 1870년이다.
민치상(1825-1888)은 조선후기 예조판서, 판의금부사,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양(景養), 사호(賜號)는 하당(荷堂).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5대손이며, 민용현(閔龍顯)의 아들이다. 1845년(헌종 11) 전강(殿講)에서 수석하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849년 홍문관수찬에 임용되었다. 1850년 8월 진하사은 겸 세폐사(進賀謝恩兼歲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56년(철종 7) 홍문관부응교·예방승지, 1859년 성균관대사성, 이듬해 홍문관제학을 역임, 이어 도승지에 올랐다.1863년 철종이 죽은 뒤 영의정 김좌근(金佐根)과 함께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趙氏)의 전교(傳敎)를 받들고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 이명복(李命福)을 잠저(潛邸)로부터 궁궐까지 봉영(奉迎), 시위(侍衛)하였다.1866년 이조참판을 거쳐 1867년 공충도관찰사(公忠道觀察使)가 되었다. 그 재임 중인 1868년 오페르트(Oppert, E.)의 남연군묘 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이 발생하였다. 그 뒤 1870년 11월까지 공충감사(公忠監司)를 연임했고, 같은 해 12월 형조판서에 승진하였다.1871년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두번째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판서·공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재임 중 1873년 수원유수 민승호(閔升鎬)와 직임을 상환(相換)하였다. 1874년 호조판서가 되어 시강원좌부빈객(侍講院左副賓客)을 겸임, 1876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까지 겸하였다.1878년 이조판서를 거쳐 1881년 제도개편 때 전선사당상(典選司堂上)이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의 친족으로 난군에게 피습, 가옥을 파괴당하였다. 그 뒤 1885년 강원도관찰사에 부임, 환곡의 폐해로 인한 원주 지방민의 민요를 겪었다. 글씨를 잘 썼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민치상(閔致庠)]
충북에는 민치상의 선정비가 음성향교의 불망비와 합하여 4기의 불망비가 있습니다.왼쪽부터 청산면 교평리/충주시 금가면/금왕읍 무극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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