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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면 대안리 신기복효자문(靑城面 大安里 申基福孝子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청성면 대안리 신기복효자문(靑城面 大安里 申基福孝子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9. 21. 08:43

 

계절은 변하지 않는다. 추석이라고 들판에는 풍요로움이 넘친다.이 때쯤이면 문화재나 향토문화재의 사진을 찍기가 참 좋다. 주위를 깨끗히 제초해 놓으니 깔끔하고 살펴보기도 참 좋다. 청성면 대안리 신기복효자문도 마찬가지다. 마을 중앙에 자리잡고 있어 눈에 딱 띤다.향나무로 들러싸여 있다. 기와와 단청이 세월을 입고 있다 보수가 필요해 보인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저 옛날이야기 처럼 낯선 느낌으로 다가오리라. 그래도 어떻든 그 속에 배움이 있고 그 배움을 바탕으로 또 조금씩 성장할수 있을거란 생각을 놓고 싶지는 않다. 효자문옆에 깨밭에서 부는 바람이 코를 간지럽힌다.

 

신기복의 본관은 영산靈山으로 청성면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신규령申奎齡이며, 아버지는 신필하申必夏이다. 어려서부터 지극정성으로 부모를 섬겼으며, 자라서는 항상 부모의 뜻을 받들었다. 평소 술을 경계하여 취하게 먹지 않았는데, 혹 손님이 억지로 권하여 얼굴에 취기가 돌면 아버지가 종아리를 때렸다. 그러면 그는 일어나 춤을 추며 ‘나의 나이가 60인데도 아버지께 종아리를 맞는다. 우리 집안의 경사이니 누구의 경사가 이보다 크겠는가?’라고 하였다. 또한 일찍부터 침술과 약재를 배워 사람들에게 ‘어버이를 모시는 자는 어쩔 수 없이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렸을 때는 의원을 불러 약을 올리는 한편 대변의 맛을 보아 증세를 확인하고, 목욕재계하고 한밤중에 집 뒤에 있는 산에 올라가 기도하였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날은 집에 계신 아버지가 걱정되어 바쁘게 내려오면서 짚신과 버선이 모두 벗겨지고 두 발에 피가 흘렀는데도 알지 못하고 아버지의 병세를 살폈다. 이후 아버지의 병세가 점점 호전되어 나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병에 걸렸을 때 잉어회를 먹고 싶어하였는데, 마침 한겨울이라 구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때 마침 이웃 사람이 그것을 가져왔고, 우황을 사용하고자 하였는데 약재상이 그것을 보내왔다. 밤에 부인과 함께 하늘에 기도하고, 물을 길러 가는 도중에 호랑이를 만났는데 호랑이에게 타이르듯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는 중이라 말을 하니 호랑이가 곧 꼬리를 내리고 가면서 마치 보호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또 의원이 어머니의 병에 꿩국이 좋다고 하였는데 갑자기 꿩 세 마리가 방으로 들어와 그것을 삶아 드렸더니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가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시자 지극히 슬퍼하며 매일 묘소에 찾아가 눈물을 흘리니 풀이 말라 죽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게 하였다.그의 부인 청송심씨 또한 시집 와서 나이 많은 시부모 봉양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이러한 신기복과 그의 처 청송심씨의 효행이 유림회에 알려져 1929년 포창문이 내려졌고, 1934년 그의 고손이 효자문을 세웠다

 

 

포창문이 걸려있습니다.

현재 효자문은 청성면 대안리에 있으며, 효자문 안에는 ‘효자영산후인신기복처청송심씨지려(孝子靈山後人幸基復 妻靑松沈氏之閭’)라는 편액과「포창문褒彰文」, 「효려각기孝閭閣記」를 새긴 편액이 있다.

 

효자,효부 현판이 세월을 입었습니다.
효문각기도 한쪽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대안리(大安里)는 원래 청산현 서면 마장리에 속해있던 마을로서, 그 후에 도장리와 대안리로 갈라져 현재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이나 1891년의 기록에 다같이 청산현 서면 마장리로 126호가 살았던 것으로 되어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이 청산현이 없어지고 옥천군에 소속되면서 서면이 청서면으로 되고 마장리가 이때 도장리와 대안리로 나뉘어 졌다. 대안리라 부르게 된 것은 “한재미”라 하여 “한”은 크다는 옛말이고 “재”는 고개 즉 티를 말하는바 마을 뒤에는 안남면 도농리로 넘어가는 큰 재가 있어 사실은 대티이나, 질마재라 하여 안티라 부르면서, 대티의 대(大)자와 안티의 안(安)자를 붙여서 대안리라 하였다.

안티라는 뜻은 `수레를 끌 때 말이나 소등에 안장같이 얹는 제구의 모양을 한 고개와 같다’하여 질마(안), 재(티)라 부르고 있다. 귀평(貴坪)은 “귀골”을 귀곡(貴谷)이라 부르고 “평지마”를 평촌(坪村)이라 부르면서 귀곡의 귀자와 평촌의 평자를 한자씩 취하여 귀평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대안저수지는 1972년 축조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질마재, 골래미(골나미), 평지마, 양지마, 가래골, 소목, 잼마, 귀골, 지렁이(지령이) 등이 있다

 

 

단청등 보수가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