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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면 금암리 전승업선생추모비(東二面 金岩里 全承業先生追慕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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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면 금암리 전승업선생추모비(東二面 金岩里 全承業先生追慕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11. 14. 13:01

 

동이면 금암리에 있는 옥천전씨세거지비와 함께 있는 인봉 전승업선생의 추모비입니다.

전승업(全承業, 1547 명종 2~1596 선조 29)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며 의병활동을 하였다. 옥천전씨는 옥천의 유력한 성씨 중 하나로 고려 말부터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전숙全淑이 판도판서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동이면東 二面 적하리(赤下里, 지시래)에 은거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전팽령의 손자인 전승업은 임진왜란 때에 금산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열사 700명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중봉 조헌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전승업의 자는 효선孝先이고, 호는 우재愚齋인데 만년에는 인봉仁峰으로 불렸다. 본관은 옥천이며, 선산곽씨 모친 하에 1547년(명종 2)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디 과거를 보는데 필요한 글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어버이의 명으로 과거 공부를 하여 1568년(선조 2) 증광 초시에서 장원하고 1572년(선조 5)에 또 급제하였으나, 거듭 회시에서 낙방을 하자 “선비가 참됨을 잃는 데는 과거 시험을 자주 보는 것 같은 게 없다”하고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자신의 인격을 닦는 학문에 힘썼다. 이후 천거에 의해 중학교수·동문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의 병이 더욱 심하다 하여 사양했다.

 

 

 

벼슬을 그만둔 조헌이 1584년(선조 17) 옥천 안내에 은둔하고 있었다. 이에 전승업은 조헌이 있는 곳을 왕래하며 도의를 강론한다. 그는 본디부터 산수를 즐겼는데 조헌과 서로 당시의 상황에 우려를 표하고 왜란이 있을 것을 미리 예측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왕이 수도를 떠나자 그는 인봉정사(안내면 용촌리)에 있다가 통곡하며 “임금이 피난 을 갔는데 신하가 집에 앉아서 바라만 볼 수 있겠는가?”하고 큰 아들을 조헌에게 보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했다. 이어 건장한 종 100여 명을 모으고 잡곡 등 100여 석을 모아 우선 군량미로 충당한 다음 청산·영동에 격서를 보내 군량미를 모았다.
8월에 전승업과 조헌은 1,600명의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서문 밖에 진을 쳤다가 적과 싸워 크게 승리했다. 이를 왕에게 알리기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관군과의 충돌로 인해 전달되지 못하자 왕께 글을 직접 전하고자 길을 떠났다. 그러나 조헌과 그의 의병들이 금산 에서 적을 치다가 전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소를 곽현에게 주어 전하도록 하였다. 전승업은 곧바로 금산의 싸움터로 돌아와 의병 700명의 시신을 거두어 큰 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조헌의 시신을 수습하여 옥천으로 돌아와 장례를 지내고 그가 나라에 올린 글과 기타 잡저를 모아 조헌의 유고집을 만들었다. 이후 조헌의 모부인과 아들을 인봉정사에서 함께 지내게 하였고 마음을 다해 도왔다.
전승업은 평소 병이 있었는데 임진왜란을 겪은 후 더욱 심해져 날마다 약을 복용하면서도 금산에서 조헌 등과 함께 죽지 못했음과 왜적을 섬멸하지 못했음을 한으로 여기다 1596년 봄에 갑자기 세상을 떴다. 묘소는 동이면 금암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