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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면 도이리 조헌,조완기 충신,효자문(安內面 挑李里 趙憲,趙完基 忠臣,孝子門) 본문
안내면 도이리 마을입구에 있는 조헌과 그의 맏아들 조완기의 충신,효자문입니다.
조완기(趙完基, 1570 선조 3~1592 선조 25)는 조선 중기의 효자로 자는 덕공德恭, 호는 도곡道谷,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중봉重峰 조헌趙憲의 맏아들 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 조헌을 따라 종군하였다.
이때 어 머니 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고, 그의 할머니가 아직 생존해 있었다. 이에 아버지 조헌이 싸움터 에 나가지 말고 집안을 돌보라며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는 위태로운 전장에서 아버지를 돌보겠다며 한사코 듣지 않고 끝내 종군하였다. 그리고 항상 아버지 곁에서 시중을 들고 보호하였다.
청주성 싸움에 출전하여 청주성을 왜군의 점령으로부터 탈환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금산전투에 출전하였을 때 전세가 아군에게 불리해지자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자기가 장수인양 색다른 옷을 입고 적의 표적이 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장서서 지휘하다가 칠백의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후 나라에서 이와 같은 그의 애국충정과 효성을 기려 1615년(광해군 7)에 효자로 정려하고, 아버지 조헌의 충신문 왼쪽에 효자문을 세웠다. 1673년(현종 14)에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 平에 추증하였다. 1734년(영조 10)에는 표충사表忠祠에 배향되었다.
효자문은 안내면 도이리道李里 후율당後栗堂 경내에 있으며, 편액에는 ‘효자증통선랑사헌 부지평조완기지려孝子贈通善郞司憲府持平趙完基之閭’라고 쓰여 있다.
조헌(趙憲, 1544 중종 39∼1592 선조 25)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자는 여식汝式 이고,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이며, 본관은 배천白川 이다. 조황趙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세우趙世佑이고, 아버지는 조응지趙應祉이며, 어머니는 차순달車順達의 딸이다.
이이(李珥, 1536~1584)·성혼(成渾, 1535~1598)의 문인으로 1555년(명종 10)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는데, 집이 몹시 가난해서 추운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았으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도울 때나 땔감을 베어 부모의 방에 불을 땔 때에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1565년(명종 20)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 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
1572년(선조 5)부터 교서관의 정자·저작·박사를 지내면서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려 국왕을 진노하게 하였다. 명나라 사절 박희립朴希立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다녀와 『동환봉사東還封事』를 지어 올렸다.
1575년부터 호조좌랑·예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현감으로 있을 때, 관노의 횡행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부평으로 귀양 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났으며, 다시 공조좌랑·전라도도사·종묘서령宗廟署令을 역임하였다
1582년(선조 15)에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보은현감을 자청하여 나갔는데,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혔다. 그러나 대간의 모함에 따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제독公州牧提督을 지냈다.
1587년(선조 20)에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의 잘못을 논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짓는 등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시 일본 사신을 배척하는 상소와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상소를 대궐문 앞에 나아가 올려 국 왕의 진노를 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군 안읍(안내면 용촌) 밤티安邑栗峙로 들어가 후율 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다시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정치개혁을 강하게 주장하다가 길주 영동역嶺東驛으로 유배되었으나 이해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할 때 조정이 우왕좌왕하자, 옥천에서 올라와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강하게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을 모으고 영규靈圭의 승군僧軍, 청주 박춘무 의병장과 합쳐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청주성은 원래 방어사防禦使 이옥李沃이 지켰으나 갑자기 왜군이 쳐들어오자 제대로 한 번 싸우지도 못하고 성을 빼앗겼고, 청주성을 점거한 왜장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는 7천여 명의 병력 중 일부로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옥천에서 기병한 조헌이 김절金節·김략金簽·박충검朴忠儉 등과 함께 보은報恩·차령車嶺 에서 왜적을 무찔렀고, 이에 충청도 서남지구의 이광륜李光輪·장덕익張德益·신난수申蘭 秀·고경우高擎宇·노응탁盧應晫 등까지 그의 깃발 아래 모여들어 의병은 1,600명으로 늘어 났다. 조헌은 이 의병들을 이끌고 온양溫陽·회덕懷德 등으로 이동하며 지역 민심을 안정시켰고, 다시 영규가 이끄는 승병 1,000여 명이 합류하자 방어사 이옥의 군대 500명, 박춘무 청주의병 1,000여 명과도 연계하여 1592년 8월 1일에 청주성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의병들은 청주성 서문西門을 향하여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조헌의 의병은 활, 칼, 창 등으로 무장하였고, 영규 휘하의 승병들은 선장禪丈, 낫, 도끼 등으로 무장하였는 데, 왜군은 조총으로 맞섰으나 비장한 결의로 돌격하는 의병에 겁에 질려 성안으로 후퇴 하였다. 조헌이 싸움을 독려하여 성곽을 오르게 하였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며 서북쪽으로 부터 소나기가 휘몰아쳐 더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조헌은 하늘을 우러러 “옛 사람이 이르기를 승패勝敗는 천운天運에 달렸다고 하더니 과연 그런가 보다.”고 탄식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날 밤 왜적은 성 안에 불을 놓고 기旗를 세웠다. 조헌은 왜군이 북문北門으로 빠져 나갈 것을 염려하여 방어사 이옥李沃에게 북문 밖에 복병을 배치하도록 요청하였다. 그 런데 이옥은 병졸을 매복 시키지 않아 왜적은 그날 밤 어둠을 이용하여 북문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청주성 탈환의 공로로 조헌에게 종4품의 봉상시첨정奉常侍僉正의 벼슬을 담은 교서가 내렸으며, 영규에게 당상관堂上官의 벼슬과 단의段衣가 내려졌다.
이후 다시 조헌은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왜군과 금산에서 결전을 벌인다. 금산성을 지키던 왜군은 제6군인 고바야가와 다케가게小早川隆景 군으로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와 타치 바나立花統虎 등이 지휘하는 1만 5,000여 명의 막강한 부대였다. 이들은 1592년 6월에 영동永同을 거쳐 금산에 침입하여, 장차 호남의 곡창 지대를 점거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 6월 22일 금산군 제원면 개티에 다다르자 당시 금산군수 권종(權悰, ?~1592)은 수백의 병력으로 이를 방어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금산성을 점거한 왜적은 두 파로 갈라져 곰티와 배티를 넘어 전주에서 합류코자 기도하 였다. 그러나 곰티에서는 김제군수 정담鄭湛의 완강한 저지를 받았고, 배티梨峙에서는 전라도 도절제사 권율의 반격으로 타격을 받았다. 그 후 금산성 5리 밖의 눈벌[臥平] 싸움에 고경명이 왜군을 물리치자 그들의 기세가 올랐다. 그러나 남평현감 한순韓楯이 관군을 이 끌고 북상하다가 전사한 후 아무도 금산의 적을 격멸하려고 하지 않았다.이때 조헌은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온양에서 북상하여 근왕코자 하였으나,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尹先覺이 막하에 있던 장덕익張德益을 불러 같이 금산의 적을 치자고 권유하자 온양에서 공주로 되돌아왔다. 관군과 합력하여 금산의 왜적을 토벌코자 하였으나, 관군과의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의 방해로 의병이 흩어져 오직 충의와 신의로 뭉친 칠백의사만 남게 되었다. 또한 전라관군에게 금산성 공격의 전기戰期를 알리고 같이 협공하자고 한 후, 15일 유성에 진출해 영규대사가 이끄는 수백 명의 승군과 다시 합세하여 진군하게 되었다. 칠백의사는 8월 17일 저녁에 왜적이 점거한 금산성 동쪽 10리 밖 경양산까지 진출하게 되었다.조헌의 막좌들은 “약세한 군으로 수가 많고 정예精銳한 왜적과 대결하는 것은 승산이 없으니, 당분간 군대를 정비하고 정세를 관망해 가면서 나라의 명령을 기다려야 될 줄 압니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자 조헌은 눈물을 흘리면서 “현재 임금께서 어떠한 처지에 계시는데 감히 전쟁터에서 이해를 따질 수 있겠는가, 임금이 변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 이 당연한 것이니 오늘날 나는 한번 죽는다는 것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영규대사는 “필패의 싸움에 참전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조헌의 충의에 감동되어 마침내 필사무퇴의 결의로 뭉쳐 적과 마주치게 되었다.
8월 18일 새벽에 왜적은 아군의 수효가 얼마 되지 않고 후군이 없는 것을 탐지, 사방으로 포위하고 3대로 나누어 번갈아가면서 치열한 공격을 했다. 이때 왜적은 조총 등으로 무장되었으나 아군은 활과 칼, 그리고 창과 농기구 등으로 적과 맞서게 되었다. 세 번 공 격해 온 적을 세 번 다 무찔러 금산 벌판에는 인마人馬의 신음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고 선혈은 낭자하였다. 의병들은 전상을 입고도 다시 일어나 화살이 다하면 칼과 창을 잡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로 치는 처참한 육박전이 전개되었다.이날 해가 질 무렵에 아군의 화살은 마침내 다하여 왜적은 마지막 총공격을 감행하였 다. 이때 조헌의 휘하 한 사람이 잠시 피하여 전열을 가다듬을 것을 종용하였으나 “오늘의 사태는 죽음 한 가지만이 있을 뿐이다. 죽든가 살든가, 앞으로 나아가든가 뒤로 물러 서든 간에 다만 의義라는 글자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더욱 독전하였다. 영규대사는 장창과 낫으로 무장된 승병을 독려하면서 “생사生死의 명命은 재천在天이다.다만 의를 좇아 순殉할 뿐이다”고 외치면서 구름같이 밀려오는 왜적을 무수히 무찔렀다. 한편 사태가 위급하자 조헌의 아들 완기는 아버지를 구하고자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적진에 돌입하였다. 이때 왜군은 그를 아군 대장으로 오인, 집중 공격을 가해 마침내 그 시체가 찢기는 참사가 벌어졌다. 조헌의 부하 이광륜李光輪·임정식任廷式·이려李勵·곽자방 槨自防 등은 저마다의 능력을 다하여 진종일 분전하였으며, 칠백의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 사람도 대열에서 벗어나거나 후퇴함이 없이 적을 무수히 무찌르고 전원이 옥쇄玉碎하고 말았다.조헌의 아우 조범趙範은 싸움이 끝난 다음날 죽음을 무릅쓰고 싸움터에 나가 조헌의 시체를 수습하였는데, 조헌은 대장기大將旗 밑에서 운명하였고, 장졸들은 그를 에워싸고 전사하였으니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한다. 조헌의 장례는 4일 만에 치렀는데 그 얼굴빛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같았고, 눈을 부릅뜨고 턱을 들어 수염이 치올라 있어서 죽어서까지 왜적의 박멸樸滅을 지휘하는 듯 하였다고 한다.
1604년(선조 37)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봉되었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 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 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그의 묘소는 안남면 도농리에 있다. 1656년(효종 7) 신도비를 세웠는데 청음淸陰 김상헌이 글을 짓고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중봉의 묘소가 현재의 장소로 옮겨진 것은 그가 죽은 지 44년 만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아늑한 곳을 택하여 편히 모시기 위함이 었다고 한다. 옥천의 표충사, 금산의 성곡서원, 보은의 상현서원 등에서 그의 충절을 받들어 제향하고, 금산에는 비를 세웠으며 7백의총이 있다. 그의 저서로는 『중봉집』, 『중봉 동환봉사』가 있다. 그는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와 함께 ‘임진사충신’의 한 사람이다.
'충북의 바람소리 > 옥천군(沃川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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