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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도면 중척리 노봉서원묘정비(賢都面 中尺里 魯峯書院廟庭碑) 본문

통합청주시/서원구(西原區)

현도면 중척리 노봉서원묘정비(賢都面 中尺里 魯峯書院廟庭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1. 25. 08:20

한가롭다 못해 쓸쓸한 농촌의 모습입니다. 노봉서원터로 가는 길입니다.

 

노봉서원은 광해군2년(1610)에 오시립(吳時立), 오유립(吳裕立), 오명립(吳名立), 보성오씨 일문과 정렴(鄭磏)의 처갓집 자손인 유흥림(興霖)이 송인수와 정렴(鄭磏)을 모시기 위해 구룡산 자락 노봉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광해군7년(1615)에 완공하고 청액소(請額疎)를 올려 효종9년(1658)에 허락을 받아 현종3년(1662) 사액(賜額, 임금이 현판을 내림, 즉 국가 공인 서원)받았다. 1694년(숙종20) 송준길(宋浚吉, 1706년 검담서원으로 옮김), 1695년(숙종 21) 송시열(宋時烈), 1725년(영조1) 권상하(權尙夏)를 추가 배향하였다가 송준길은 부용면 검시에 검담서원을 지어서 빠져 나갔다. 오시립, 송시열, 권상하가 원장을 하였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된 다음 복원하지 못하고, 터에는 노봉서원묘정비(魯峯書院廟庭碑)만 남아 있다.
노봉서원은 통합청주가 되기전 청원군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고 가장 먼저 사액(賜額)받았다. 검담서원과 송천서원은 후에 사액받았다. 그러므로 역사적 가치와 비중이 가장 큰데도 복원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서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던 문인과 석학, 정치인, 충신을 모셔서 그들의 뜻과 학문을 따르던 곳으로 그들의 자취와 글을 듬뿍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료를 발굴하고 복원하여 문화유산으로 남겨주어야 할 것이다. 노봉서원 자료는 다행히 조선왕조실록, 한수재문집, 규암집, 동춘당문집, 죽천집,송자대전, 지선정유고, 영모재집 등에 남아 있다(현도면지, 2008. 참조)

 

 

노봉서원터에 남아있던 노봉서원묘정비의 모습입니다.

 

현도면 하석리의 노봉서원터를 오랫만에 찾아본다. 인적없이 햇살 가득한 노봉서원터는 한가롭기 그지 없다. 그런데 서원의 존재를 알게 해주던 묘정비가 없다. 그 자리에는 그나마 노봉서원 묘정비의 유허표지석이 있으니 다행이련가? 노봉서원 묘정비는 현도면 중척리의 강고사로 이건하였다는 표지석이 위로를 준다.

 

노봉서원이 있던 터의 현재의 모습입니다.

 

비석을 현도면 강고사로 옮기고 그 자리에 유허표석을 세웠습니다.묘정비를 조정비라고 잘못 적어놓았습니다.

 

노봉서원 묘정비가 있던자리에 표지석을 세웠다.2019년 11월에 강고사로 옮겼습니다.

 

현재 중척리에 위치한 강고사의 모습입니다

 

현도면 중척리에 위치한 강고사 입니다. 주변으로는 지선정등 보성오씨가문과 관련된 유적들이 있습니다. 주차장등 편의시설도 갖추어져 있습니다.강고사는 1932년에 보성오씨(寶城吳氏) 문중에서 진사 지선정(止善亭) 오명립(吳名立, 1563∼1633)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971년에 노봉서원(魯峰書院)에 배향되었던 문헌공(文憲公) 대사헌(大司憲)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487∼1547)와 포천현감(抱川縣監) 북창(北窓) 정렴(鄭, 1506∼1549)을 추향하고 매년 음력 3월 15일에 향사하고 있습니다.

 

 

강고사에서 지난세월을 반추하며 새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