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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면 경순왕릉 장명등(長南面 敬順王陵 長明燈) 본문

전국방방곡곡/연천(漣川)

장남면 경순왕릉 장명등(長南面 敬順王陵 長明燈)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3. 16. 11:02

 

연천군 백학면에 처가집을 찾았다가 주위에 있는 경순왕릉을 다시 찾았습니다. 몇번이고 방문한 곳이지만 갈 때마다 느낌이 다릅니다. 이 번에는 찾으니 능 으로의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는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능에 계신 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경순왕릉 앞에 서있는 장명등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사면에 문양도 잘 살펴보았습니다.

 

장남면에 있는 경순왕릉의 현재의 모습입니다.

 

 

장남면 고량포리에 위치한 경순왕릉은 사적 제244호. 지정면적 11,777㎡. 무덤봉분의 지름은 7m, 높이는 약 3m이다.

경순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 제46대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927년에 왕이 되어 935년 왕건(王建)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까지 9년간 재위하였으며 978년(경종 3)에 죽었다. 능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 조선시대에 찾게 되었다고 하며, 신라의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무덤의 외형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둘레에는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무덤보호를 위해 병풍처럼 돌렸고 능 주위로는 곡장(曲墻)이 돌려져 있다.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고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 있는 비문의 내용에 의하여 경순왕의 무덤임이 확인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되었다.

능 앞에 있는 기타 석물로는 네 면에 사각 화창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長明燈)과 함께 그 좌우로 석양(石羊)과 망주석(望柱石)이 하나씩 서 있다. 신라왕릉의 경우 곡장이 마련된 것이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왕릉에 비로소 곡장을 마련하고 있어 묘비에서와 같이 경순왕이 죽자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릉의 주변에는 1986년에 건립된 재실과 신도비를 보호하는 비각이 서 있다. 왕릉으로의 일반인의 접근을 방지하는 나무 목책을 설치하였습니다.

 

 

 

 

 

장명등은 비단 분묘뿐만 아니라 사찰이나 관가 등의 공공 건축물의 처마 끝에 달거나 마당에 기둥을 세워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장치한 등도 장명등이라고 한다. 분묘 앞의 장명등을 일명 석등룡(石燈龍) 혹은 석등(石燈)이라고도 한다.

분묘 앞에 장명등을 세우게 된 시원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분묘제도에 의하면, 분묘 앞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나 문무신상(文武神像) 등의 석조물을 세우는 데는 피장자의 신분 혹은 품계를 기준으로 엄격하게 제한하였고, 장명등의 경우는 일품재상(一品宰相)에 한하여 세울 수 있도록 한정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와 같은 묘제가 확립된 시기부터 장명등이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덤 앞이나 사찰의 경내에 세워진 장명등은 받침대와 몸체 부분·지붕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받침대는 대부분 8각형 기둥 모양이며, 이 위에 등을 넣을 수 있도록 네모지게 만든 부분이 얹혀 있고, 몸체 부분 위에는 마치 정자의 지붕처럼 생긴 삿갓지붕을 조각하여 몸체 부분을 보호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 세 부분은 분리하여 축조한 경우도 있고, 하나로 연결하여 조각한 경우도 있다. 장명등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묘역이나 건물의 외부공간을 밝히는 데 있으나, 분묘의 장명등은 이외에도 피장자의 조선시대의 신분을 표상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와 같은 엄격한 분묘제도가 없는 현대에서도 호화 분묘의 경우 장명등을 비롯한 각종의 석조물을 세운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피장자의 신분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후손의 효행이나 사회적 지위, 경제적 계층을 반영할 의도로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장명등 사면에 새겨진 문양입니다. 

 

장명등의 비갓의 사면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