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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중군조겸희영세불망비(公山城 中軍趙謙熙永世不忘碑) 본문

전국방방곡곡/공주(公州)

공산성 중군조겸희영세불망비(公山城 中軍趙謙熙永世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8. 27. 08:22

 

공산성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선정비중에 하나인 중군 조겸희의 영세불망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중군조공겸희영세불망비(中軍趙公謙熙永世不忘碑)라고 각자되어 있으며 비석의 상태는 양호합니다.조겸희는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철종9년(1858년)에 충청중군에 임명되었음을 알수있습니다.

 

 

승정원일기 2604책 (탈초본 125책) 철종 9년 6월 22일 병인 33/37 기사 1858년  咸豊(淸/文宗) 8년

○ .... 金榮根爲西北僉使, 孟鳳烈爲龍津萬戶, 景元明爲鳥嶺別將, 權鳳夏爲晉州營將, 趙謙熙爲忠淸中軍, ....

 

 

중군이라 함은 조선시대 종2품 무관직으로 각 군영(軍營)의 대장 또는 사(使)에 버금가는 장관(官)을 칭합니다

.총리영(摠理營)과 진무영(鎭撫營), 각 도의 순영중군(巡營中軍)은 정3품직이다. 각 영에서 대장 또는 사를 보좌하면서 모든 실무를 총괄하였다.

5군영의 중군은 번갈아 가며 병조 능마아청(能麽兒廳)의 당상관을 겸하였다. 용호영의 중군은 금위별장을 겸하기도 하였으며, 금군별장과 함께 초관(哨官)·교련관(敎鍊官)을 시취(試取)하였다.

훈련도감의 중군은 훈련도감의 마군(馬軍)과 보군(步軍)의 군안(軍案)을 관리하면서 모군(募軍) 보충을 결정하는 한편, 각 초의 색복마(色卜馬)를 주관하여 봄·가을로 검사하였다. 매달의 훈련 및 고시도 감독하였다.

중군의 유사시에는 당상장관 중에서 겸중군(兼中軍)을 임명하였다. 습진(習陣) 때에 중군기(中軍旗)와 북은 좌·우 각 별장이 거느리고 중앙에 위치하였다. 이 때 중군수기의 명칭은 조금씩 달랐는데, 훈련도감의 중군은 삼군사령, 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의 각 중군은 금위군사령·어영군사령·수어제군사령(守禦諸軍司令)·총융제군사령이라 하였다. 국왕을 배호(陪扈)할 때 국왕이 융복을 입으면 중군은 대장과 함께 갑주를 착용하였다.

옛 규례에 총융사의 경력을 지닌 자가 훈련도감의 중군으로 많이 임용되었다. 그러나 1783년(정조 7) 총융사 서유대(徐有大)가 전임이 되면서 겸임이 폐지되었다. 총융청의 중군은 북한산성관성장(北漢山城管城將)을 겸하였다. 또, 삼도통어영·삼도통제영의 중군은 수군(水軍) 조련시 여러 배를 거느리고 훈련하였다.

중군의 시예(試藝)는 편전(片錢)을 1순(旬)하는데 5시(矢) 명중하면 무명 10필, 삼베 8필, 쌀 3석, 활 1장을 포상하였으며 4시 이하는 차차 감하였다.

요록(料祿)은 군직록(軍職祿)과 각 도에서 떼어서 지급하는 요를 받는데, 은결수미(隱結收米)·별급미(別給米)·아록춘미(衙祿春米) 등을 지급받았다.[네이버 지식백과] 중군 [中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