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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인면 쌍암리(懷仁面 雙岩里) 본문
쌍암리는 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내북면, 서쪽은 신문리, 남쪽은 고석리, 북쪽은 내북면과 청원군에 접해있다.
본래 회인군 동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초개동, 능암리, 계암리를 병합하여 능암과 계암의 이름에서 따라 "쌍암리"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 능암 : 쌍암리의 중심마을 고려때 웅암사란 절이 있던 곳으로 절이 없어지고 마을이 생겼다하여 웅자에서 아래 네점을 버리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동재정씨 집성촌이다.
- 지바우 : 능암 서남쪽에 있는 마을 계목와 큰 바위가 있다.
- 초갯-골 : 능암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풀이 무성하였다 한다.
장수굴
보은군 회인면 능암리 마을 뒷산에 "장수굴"이라 부르는 굴이 있다.
조선 선조때의 이야기다.
이 굴에 장수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큰 고목나무를 한손으로 뿌리째 뽑았으며 한번에 큰 돼지 한 마리와 술 세동이나 먹었으나 그렇다고 특출한 무예는 없었다.매일 열자나 되는 긴 창을 들고 다녔으나 사냥조차 제대로 못하였으며 얼마나 게으른지 한번 잠이 들면 석달 열흘간이나 쿨쿨 잠만 잤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졸지장의 명색만 장수"라고 비웃었으며 흑심한 사람은 "미치광이장수"라고 놀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내색도 않고 소같이 많이 먹고 배부르면 다시 굴안에 들어가 세상 모르게 잠만 잤다.
어쩌다 그가 마을 앞에 나타나면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미치광이 장수"라고 놀려 주었지만 그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마침내 왜놈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와 이곳 마을까지 당도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허겁지겁 왜병을 피하여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때까지 굴안에서 잠을 자던 장수가 창을 들고 나타났다.장수는 한 손에 긴창을 들고 왜병을 상대하여 싸우기 시작했는데 빠르기가 바람같았다.
한손으로 왜병 두명을 한꺼번에 번쩍 들어 집어 던지는가 하면 한창에 적병을 십명씩이나 곶감끼듯 찔러 버렸다.
왜적은 감히 당하지 못하고 뿔뿔이 도망갔다. 장수는 그제서야 다시 술과 고기를 청하여 배부리게 먹고 "나는 이제 속리산 문장대로 간다"하면서 굴안을 들어갔다.
그 뒤 세월이 1년이 지나도록 장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궁금하여 굴속들은 굴속에 불을 때면 연기를 못참고 장수가 굴밖으로 나올것이라 믿고 나무를 때기 시작했다. 아무리 며칠을 두고 불을 때었지만 연기가 문장대로 나올 뿐 장수는 영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굴을 "장수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이곳에 계속하여 불을 때면 속리산 문장대에서 연기가 나온다고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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