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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면 청천리 송시열묘지(靑川面 靑川里 宋時㤠 墓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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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면 청천리 송시열묘지(靑川面 靑川里 宋時㤠 墓地)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10. 5. 06:57

 

청천면 청천리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묘지입니다.

송시열은 조선후기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607년(선조 40)에 태어나 1689년(숙종 15)년에 사망했다. 김장생·김집 부자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효종 재위 시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현종 즉위 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주자의 교의를 신봉·실천하는 데 전념하여 거대한 사상체계를 완성했다.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될 정도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당쟁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숙종 대의 기사환국 때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받고 죽었다.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송성뢰(宋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봉사(奉事) 송구수(宋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에 있는 외할아버지 곽자방의 정려각입니다

 

 

충청도 옥천군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무덤앞에 자리하고 있는 묘표석입니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송시열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주 02)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효종 6)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鄕里)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송시열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숙종 8)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 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 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송시열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겼다.
따라서, 철학사상도 주자가 구축한 체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하였다. 이후 이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 체계가 되었다.

먼저 철학사상을 살펴보면,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정직[直]의 실천 문제였다. 때문에 형이상학적 학설 논쟁에만 몰두하지는 않아 송시열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은 특별히 주목받지 못한 면이 있으나, 실상은 당대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이기·심성론에는 주자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이의 설을 계승, 발전시켰다. 즉, 여러 상이한 이론과 개념들을 수용하여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정립하였다. 이(理)·기(氣)의 선후 문제나 혼합성[不相離]·분리성[不相雜] 등과 같은 문제는 항상 이율배반적인 쟁점을 가진 것이었으나, 송시열은 이러한 문제들을 입론처(立論處)에 따라 범주화(範疇化)하여 각기 타당성을 논증, 형식 논리의 모순을 극복하였다.

예를 들면 이·기의 관계를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즉, 이는 이·기의 상호 관계를 보다 명확히 하고 논리적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기가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라는 이이의 대명제를 받아들여, 이것을 이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에도 동(動)과 정(靜)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이가 기를 주재하기 때문이며, 기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에는 동과 정이 없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기가 이를 운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그리고 원두(源頭)의 측면에서 말하면, 이·기에 선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논리적 이선기후(理先氣後)를 말하는 것이며, 유행(流行)의 측면에서 말하면, 이·기에 선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니, 그것은 변화의 세계에서는 이·기가 공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입론처에 따라 타당성을 인정하고 범주화하여 통합하는 방법은 상이한 특수 이론들을 수용하여 체계화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 밖에 형(形)과 기(器)의 혼동을 분별하여 형·기·도(道)의 관계에 삼단설(三段說)을 세운 것도 송시열의 독창적인 면이다. 심성론에 있어서는 마음을 기[心卽氣]로 보는 정통적 입장에 있었으나, 입론처에 따라서는 '마음도 태극이 되는 것(心爲太極)'이라 하여 마음 본체의 무궁함을 말하기도 하였다.
또 송시열은 마음이 발하기 전의 상태를 성품[性]으로, 마음이 이미 발한 상태를 정(情)으로 보았다. 마음이 발한다는 것은 곧 기가 발하여 이가 실리는 현상인데 이것이 칠정(七情)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리파(主理派)에서는 칠정과 사단(四端)을 엄격하게 분별했으나, 송시열은 사단도 칠정에 속하는 것이며 불선(不善)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그것이 성품에서 발할 때 절도에 맞으면 도심(道心)이 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인심(人心)이 되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송시열의 수양론(修養論)이 전개되는데 그 핵심은 ‘정의를 모아[集義] 기상을 기르는 일[養氣]’이었다. ‘정의를 모으는 일’은 곧 『대학(大學)』의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서 송시열은 이것을 ‘정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수양론도 곧 ‘정직으로서 기상을 기르는 일(以直養氣)’로 압축되었다.송시열의 지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 활동의 저력은 기상이고 그것은 정직으로서만 길러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직은 수양의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송시열은 정직의 실천을 일생의 지표로 삼았고, 제자와 후손들에게도 강조하여 마지않았다.
그런데 정직에 의한 기상의 도야는 불굴의 의지를 함양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독선과 흑백 논리에 빠지기 쉬운 경향이 있었고 화합과 타협에 장애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정치사상은 조선 중기의 사림정치 이념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원리를 『대학(大學)』에서 구했는데, 그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표현된다. 즉, 남을 다스리는 일은 자신의 수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송시열은 통치자의 도덕성 확립을 강조하였다.
특히, 임금은 만화(萬化)의 근본이므로 군덕의 함양이 정치의 제일 과제라고 믿어, 맹자의 “한번 임금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바르게 된다(一正君而國正).”는 주장을 정치 활동의 지표로 삼았다. 따라서, 송시열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왕에게 수신·제가·면학을 강조하고 사심과 사은(私恩)을 억제할 것을 권하였다.
실제 정책면에서는 민생의 안정과 국력 회복에 역점을 두었고, 그것을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건의하였다. 즉,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여 재정을 충실하게 하고, 궁중의 연악과 토목 공사를 억제하며, 공안(貢案)을 바로잡고, 군포를 감해 양민(良民)의 부담을 줄이며, 사노비의 확대를 억제하여 양민을 확보하며, 안흥에 조창(漕倉)을 설치하자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서정쇄신책은 이이의 변통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민생 안정과 국력 양성 문제는 그 자체가 당면한 급선무였기도 하지만, 송시열은 북벌(北伐) 실현을 위한 선결 과제로 인식하였다.
송시열의 정치사상에서 또하나 간과될 수 없는 것은 예치(禮治)의 이념이었다. 이는 공자의 통치 철학이기도 했지만, 특히 김장생의 예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가 다스려지면 정치도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하게 되면 정치도 문란하게 된다. ”고 강조하였다.
예는 유교 정치에 있어서 교화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명분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송시열은 복제예송(服制禮訟)에 깊이 개입했고, 만년에는 종묘제도의 이정과 문묘배향 문제, 정릉의 복위와 효종의 세실 문제, 만동묘의 설치 등 국가적 전례 문제에 정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송시열은 김장생을 계승한 예학의 대가로서 중요한 국가 전례문제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 때문에 예학적 견해 차이로 인한 예송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1659년 5월 효종이 죽자,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인조의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차자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이 때 윤휴(尹鑴)는 『의례(儀禮)』 상복편의 소설(疏說)인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 ”는 근거에 의하여 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속이 참최(斬衰)를 입는다는 설에 의하여 참최를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의례(儀禮)』의 소설에 “서자(庶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 ”는 예외 규정[四種說]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서자는 첩자(妾子)의 칭호이기도 하고,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국왕의 상에 친속들이 3년복을 입는 것은 신하로서의 복을 입는 것인데, 어머니인 대비는 아들인 왕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윤휴의 참최설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태화(鄭太和) 등 대신들은 『의례(儀禮)』에 근거한 두 설을 다 취하지 않고, 『대명률(大明律)』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장자·차자 구분없이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즉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그리고 1660년 3월 허목(許穆)이 또 차장자설을 주장하여 3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리고 윤선도(尹善道)는 기년설이 “효종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적통과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드는 설”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참최는 두 번 입지 않는다(不貳斬)’는 설과 서자가 첩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설을 논증하고, 차장자설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제1자가 죽고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간주하는 경우는 제1자가 미성년에 죽었을 때뿐이라고 단정하였다.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으나 기년설은 번복되지 않았고, 윤선도 등 남인들은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제기되어 서인들은 송시열의 설에 따라 대공복(大功服)을 주장하여 시행되었으나 영남 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기년복으로 번복되었다.
그 결과 송시열은 ‘예를 그르친 죄’를 입고 파직 삭출되었다가 변방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송시열의 예론은 『의례(儀禮)』에 근거를 두고 전개되기는 했으나, 대체로 “제왕가의 예도 사서인(士庶人)과 다르지 않다.”는 성리학적 보편주의 예학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에 즉위, 종묘를 주관했던 효종의 제왕적 특수성과는 관계없이 차자라는 출생의 차서만이 중시되었다. 이 때문에 송시열의 본의와는 달리 왕실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두 갈래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대 북벌론의 중심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문제로 효종과 비밀 대담[獨對]을 가지기도 했고, 왕과 비밀 서찰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북벌 계획은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효종과의 비밀 대담이나 서신 왕래에서 송시열이 건의한 것은 극히 이념적이고 원론적인 것이었으며, 실제적 대책은 아니었다.
북벌론은 1659년 봄에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으나, 당시 형편으로는 즉각적인 북벌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민생의 안정과 국력 회복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양민의 부담이 컸던 급료병(給料兵)을 줄이고 민병(民兵)을 활용하자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효종의 양병정책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북벌의 실제 준비보다 그것이 내포한 이념성을 강조하였다. 명나라를 향한 존주대의와 병자호란의 복수설치 문제는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국가적 과제이며, 그것이 모든 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춘추대의의 관념에서 나온 유교적 명분론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강력한 이념이 국내 정치에서 부패와 부정을 억제하고 기강의 확립과 행정의 효율을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벌 이념은 송시열 자신과 그 일파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대의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효종의 죽음과 함께 침묵되었다가 숙종 초기에 다시 제창되었는데, 효종대에 송시열의 북벌론은 그 이념성과 함께 부국안민의 정책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숙종대에 국가의 전례 문제와 결부되어 다시 제창된 존주론(尊周論)에는 오직 당쟁에서 대의명분을 장악하기 위한 이념성만이 강조되었다.

사회사상을 살펴보면, 송시열은 매우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으나, 당시의 고질적인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또 실제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먼저 사회신분 문제에 있어서 양반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특권은 제한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에 우선 양민에게만 지워졌던 군역의 부담을 줄이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또,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의 실시를 통해 양반의 노비 증식을 억제하고 되도록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송시열은 또 서북 지방(평안도·함경도) 인재의 등용과 서얼(庶孽)의 허통(許通)을 주장하고 양반부녀자들의 개가를 허용할 것을 말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송시열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회 정책은 양민의 생활 안정이었다. 이를 위해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시행하며, 양민들의 군비 부담을 줄이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이 빈민의 구제를 위한 사창(社倉)을 설치하기도 하였다.송시열도 노비제를 인정하기는 했으나, 노비도 같은 인간임을 인식시켜 부당한 사역이나 가혹한 행위를 억제하도록 역설하였다. 충절이나 선행이 드러난 경우에는 서얼·농민·천민에 이르기까지 전기나 묘문·제문을 지어 표창하였다.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효행·정절·순종 등 전통적 미덕을 강조했으나, 동시에 가계의 관리와 재산 증식 등 주부권과 관련된 경제적 구실도 중시하였다. 사회 풍속 면에서는 중국적·유교적인 것을 숭상하여 토속적·비유교적인 것들을 개혁하고자 하였다.혼례 등의 예속과 복식,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세속과 다른 중국 습속들을 행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치를 배격하고 근면,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여 교화의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

송시열은 문장과 서체에서도 뛰어났다. 문장은 한유(韓愈)·구양수(歐陽修)의 문체에 정자(程子)·주자의 의리를 기조로 했기 때문에 웅장하면서도 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다. 특히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다.
시·부(賦)·책(策)·서(序)·발(跋)·소차(疏箚)·묘문 등 모든 글에 능했으나, 특히 비(碑)·갈(碣)·지문(誌文) 등 묘문에 명성이 있어 청탁을 받아 지은 것이 수백 편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영릉지문(寧陵誌文)은 명문으로 손꼽힌다.
서체는 처음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익히다가 뒤에 주자를 모방하게 되어 정체(正體)를 잃었으나 매우 개성적인 경지에 이르러 창고(蒼古)하고 힘에 넘치는 것으로 평판이 있었다. 그 글씨를 받아 간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고 현재도 많이 전하고 있다.

송시열은 학계와 정계에서 가졌던 위치와 그 명망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교우의 중심은 역시 김장생·김집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송준길·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으로 이들과 함께 세칭 산당(山黨)으로 불렸다. 한때는 남인 권시(權諰)·윤휴와도 절친한 적이 있었다.
벼슬에 나아간 뒤에는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들인 김수증(金壽增)·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형제들, 민정중(閔鼎重)·민유중(閔維重) 형제, 이후원(李厚源)·이시백(李時伯) 등 서인 권문세가 인사들과 정치를 같이하였다. 소론계인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이경석(李景奭)과도 친했으나 뒤에 당이 갈려 멀어졌다.
송시열은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에서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경석·윤휴 및 윤선거·윤증 부자와의 알력은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여 당쟁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만년에는 사돈인 권시와도 틈이 생기고, 이유태와 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평생의 동반자였던 송준길마저도 뜻을 달리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문 문제로 마침내 노소분당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權尙夏) 외에 김창협(金昌協)·이단하(李端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이선(李選)·최신(崔愼)·송상민(宋尙敏) 등이 고제(高弟)로 일컬어진다. 그 밖에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시로 공부한 문인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諫)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존주대의 이념이 계승되어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론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송시열에 의해 재정비된 정통성리학의 체계와 광범한 문인들의 활약 및 그 정치적인 비중 때문에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지배 이념으로서 작용할 수 있었다.

송시열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 자신이 찬술하거나 편집하여 간행한 저서들과 사후에 수집되어 간행된 문집으로 대별된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經禮疑義)』·『심경석의(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朱文抄選)』·『계녀서(戒女書)』 등이 있다.
문집은 1717년(숙종 43) 왕명에 따라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尤菴集)』이라 하였다. 이후 1787년(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 명명하였다.
그 뒤 9대손 송병선(宋秉璿)·송병기(宋秉夔) 등에 의하여 『송서습유(宋書拾遺)』 9권, 『속습유(續拾遺)』 1권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1971년 사문학회(斯文學會)에서 합본으로 영인, 『송자대전(宋子大全)』 7책으로 간행했고, 1981년부터 한글 발췌 번역본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4책으로 출간되고 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송시열(宋時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