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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면 금암리 삼층석탑(東二面 金岩里 三層石塔)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동이면 금암리 삼층석탑(東二面 金岩里 三層石塔)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3. 1. 30. 08:59

 

머리에 회로가 엉킨듯한 느낌이다.

분명 금암리 삼층석탑을 잘 찾았었는데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금암리 석탑을 본지도 거의 10여년이 되었으니 그럴만도 하겠다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 자위를 해본다.

금암3리 마을표지석을 보며 마을회관이 있는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된다.

 

 

길을 따라 50여미터 정도 올라가면 대밭으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 금암리 석탑은 대나무밭 가운데 있다.

주위가 정리정돈이 되어 깨끗하게 정리정돈이 되었다.

예전에는 잡목사이에 있어 참 보기가 힘들었는데 이쁘게 조발하고 면도까지 한 듯 깔끔하다.

 

이 탑이 있던 용암사 터는  동이면 금암리 용암마을 북쪽 산 중턱 바위 사이에 있다. 용암사는 옥천읍 삼청리에 있던 용암사와 같은 이름의 다른 절이다. 용암마을 뒷산 서쪽 경사지에 있던 이 절터는 현재 경작지와 포도밭이며 500평 정도가 절터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기와 조각이 소수 발 견되고 있다. 특히 마을 주변 산등성이로 이전한 삼층석탑은 조형미가 아름다운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동이면 금암리 용암마을 동쪽 산 능선에 있 는 삼층석탑이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 정된다. 높이 195㎝이며, 화강암으로 만든 기 단부, 탑신부, 옥개석 등의 조형미가 아름답다. 그러나 3층 탑신이 없어 아쉽다. 원래 금 암리 석탑은 용암마을 북서쪽 탑산이골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40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 였다고 한다.

 

 

금암리는 군동면(郡東面) 용암리(龍岩里)라 불리던 마을이며, 1739년 기록에는 군동면 용암리에 47호가 살았고 1891년 신묘장적(辛卯帳籍)기록에는 55호에서 15세 이상 255명이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암리 유래는 마을 뒤에 용암사란 절이 있고 큰 바위들이 용같이 뻗었다 하여 용암말 이라 불렸고 옆마을이 목시, 목쇠인데 목쇠는 목금(木金)으로 목금의 금(金)자와 용암의 암(岩)자를 따서 두 마을의 뒷글자를 합쳐서 금암리가 되었다.

금암리에는 충청북도문화재인 1545년 송정 전팽령이 건립한 양신정(養神亭)과 1765년 유림들에 의해 세워진 목담서원이 있다. 목담서원(鶩潭書院)과 목담서원에 모셔진 사서공 전식 선생의 영정, 명종 때 효자를 기리기 위한 효자정과 효자비, 그리고 그 효행을 뒷받침 하는 호천(虎泉) 등이 있다.

임진란 때 중봉 조헌선생을 도운 인봉 전승업선생은 개전초기에 중봉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 의병 100명과 군수품을 모아 보은 차령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금산전투 후 연곤평에서 순절한 의병과 승병 1,000여명의 시신을 모아 오늘의 칠백의총을 만들고 중봉선생 유족을 돌보았다.

자연마을로는 압구정, 등나무마을, 새말, 솔밭말, 건너말, 용암말, 안골말, 황새골, 옥고대, 말참묵이가 있고 건너말은 빈집만 남아 있다. 용암말에 오필렬효자문과 청주한씨(淸州韓氏)효부비가 있다.

압구정은 고창오씨(高敞吳氏)가 입향조인 공조참의 오천(吳泉)공이 세종 16년(1434년)에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20여대를 이어 살고 있다. 1978년 취락구조사업으로 적하리 분지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금암리로 집단이주 창앞마을을 이루었다.

압구정 뒤에 서당골이 있고 앞에는 갯들, 나마터, 씨드물, 돌가티, 부단지골, 막은골, 줄골이 있고 새마을 앞에서부터 대정목, 모새골, 샘골 그 앞에 새골이, 바위틈새골, 봇들, 못안이 있고, 둥구나무 마을 앞에 방아다리, 용암말 주변에 장나무골, 부흥산, 가는골, 서당골, 턱갈메기, 산지당, 탑선골, 당수말, 말래, 홍고개, 삼거리, 증갱이, 못안이 있다.

말참묵(말차목)이 앞에 수우골, 긴다랭이골, 탑송골, 부차골이 있다. 새말 주변에 줄골, 갯들, 강당, 봇들, 못안골, 찰방재, 새골, 샘골, 동자말, 새말 앞들이 있고 황새골, 못안, 섬말, 골말, 장수마루, 수골, 새터말, 뒷골, 삼거리, 찰방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