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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원동리 헌비의 묘(伊院面 院洞里 憲菲의 墓)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이원면 원동리 헌비의 묘(伊院面 院洞里 憲菲의 墓)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9. 10. 23:41

이원면은 본래 신라초에는 소리산현(所利山縣)이라 부르다가, 경덕왕 16년(757년) 이산현이라 고쳐 부르고 관성군(管城郡) 소속케 하였다.고려 현종 9년(1018년)에 경상도 경산부(성주)에 소속 시켰다가 충선왕 5년(1313년) 옥주(沃州)에 소속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 지방행정제도 일제 개편 때 이산현(利山縣)이 폐현되고, 이남면(利南面)과 이내면(利內面)으로 분할되었다.1739년에 발행한 여지도서에는 이남면을 평산리를 비롯한 9개리 619호에서 15세이상 2,687명이 살았으며, 이내면은 현리를 비롯한 8개리에 455호에서 15세이상 1,910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이산현의 안쪽이 되므로 이내면이라 하여 9개리를 관할하였다.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이내면을 그대로 두고 이남면을 이남일소면(利南一所面)과 이남이소면(利南二所面)으로 나누었다. 1914년 4월 1일 이남면(利南面), 이내면(利內面)을 이남면(伊南面), 이내면(伊內面)으로 고치고, 이남이소면(伊南二所面)의 평산, 세산, 적하리를 동이면(東二面)에 편입시켰다.

1929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남과 이내 양면을 합병하여 이원면(伊院面)이라 고쳐 불렀다. 1973년 7월 1일 이원면 우산리를 동이면에 편입시킨 후 오늘에 이른다.

 

 

 

옥천군 이원면 원동리에 있는 헌비憲菲의 무덤입니다.

송시열의 아버지인 송갑조의 유모인 헌비의 무덤과 묘비입니다. 헌비는 송시열의 할머니가 데리고 온 몸종입니다. 몸이 허약하여 송시열의 아버지인 송갑조가 4살일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몸종이었던 헌비가 송갑조를 키웠습니다. 어린시절 부터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들은 송시열이 헌비의 묘소에 비석을 세워 주었습니다. 비석은 1689년에 세웠습니다.

 

 

여종의 비를 옥천에 세우다, 우암 송시열 - 충북과 나의 연결고리 '충북일보' (inews365.com)

 

여종의 비를 옥천에 세우다, 우암 송시열

우암의 생가지인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촌을 지나 영동으로 가는 국도변인 원동리 야산에 이르면 작은 무덤과 비석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비석 제원은 높이 86cm, 폭 41cm, 두께 17cm의 화강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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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원동리 적등 나루터가 내려다보이는 4호선 경 부국도변의 낮은 산언덕 작은 묘 앞에 초라하게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우암 송시열의 아버지 수옹 송갑조의 유모 였던 송씨 집안의 여종 헌비憲悲의 묘비이다. 이 묘비는 1689년(숙종 15) 2월에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가기 전에 세웠다. 이 해에 송시열은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송시열 은 자기 아버지를 젖 먹여 키운 여종의 무덤 앞에 최후의 선물로 묘비를 세워준 것이다. 헌비는 원래 송갑조의 어머니 광주이씨의 몸종이었다. 광주이씨는 명문세가인 이윤경李潤慶의 딸로 송응기에게 시집올 때 헌비를 같이 데려왔다. 광주이씨는 아들 다섯 형제를 낳았으나, 막내 송갑조를 출산한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환경에서 송갑조는 헌비의 젖을 먹고 그의 품에서 자랐다. 이 때 헌비에게도 같은 또래의 아들 강수문姜叟文이 있어 비록 신분상에는 차이가 있으나 형제같이 자랐다고 한다. 그 후 송갑조가 성장하여 옥천 구룡촌 곽씨 집안에 장가를 들고 옥천으로 올 때 헌비도 같이 따라와 평생을 함께 지냈다. 헌비가 세상을 떠나자 양지 바른 언덕에 장사를 지내주고 늘 그 정을 잊지 못해 아들 송시열에게 헌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비는 장방형의 비좌 위에 높이 86㎝, 폭 41㎝, 두께 17㎝의 비신을 세우고 앞면에다 “贈領議政 睡翁宋公 乳母憲悲之墓 子姜叟文墓在左 崇禎六十一年 二月 日立(증영의정 수옹송 공 유모헌비지묘 자강수문묘 재좌 승정 61년 2월 일입)”이라 새겼다. 당시 신분만을 내세워 노비의 절대적 희생만을 강요하던 양반사회에서 송씨 가문이 베푼 인도적 처사, 즉 신분을 초월해서 은혜를 보은한 징표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이원면 용방리 송갑조유기비(伊院面 龍坊里 宋甲祚 遺基碑) (tistory.com)

 

이원면 용방리 송갑조유기비(伊院面 龍坊里 宋甲祚 遺基碑)

물 오른 모과나무가 이쁘다. 인적이 끊어진 집은 속절없이 세월을 입고 있지만 오는 계절은 긴 그림자 끌며 무너지는 집터위로 가득하다. 사람의 온기를 잃은 집은 무너져 내리고 송갑조 유기비

king6113.tistory.com

 

 '贈 領議政 睡翁宋公(증영의정수옹송공) / 乳母憲菲之墓(유모헌비지묘) / 子姜叟文墓在左(자강수문묘재좌) / 崇禎六十一秊 二月立(숭정육십일계이월입)'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원동리는 원래 옥천군 이내면(利內面) 원동리(院洞里)라 불러 오던 마을이다. 원동리라 부르게 된 것은 관리들의 여행 중에 숙식을 제공하여 주던 적등원(赤燈院)이 이곳에 있었기에 원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739년 기록에는 이내면 원동리라 하여 62호가 살았으며 1891년 신묘장적에 의하면 72호가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07년말 현재 원동1리 81호 173명, 원동2리 67호161명이 살고 있다. 원동 1구는 접둥으로, 강 언덕으로부터 벌담, 중간말, 웃말로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중간말과 웃말 사이를 왕복 4차선 경부국도가 관통하고 있다.

1999년 백지리(白池里)로 가는 마을도로가 개통 되고 금강에 교량이 개설되었는데, 이 도로 북쪽 강가에 옛날 표충사가 있었던 서원밭이 있고 길 남쪽 작은 동산에 유모 헌비의 비와 망선대(적등루) 옛터에 네개의 주춧돌이 남아있다. 망선대(望仙臺) 절벽앞 강가에 양수장이 있어 원동, 용방리 넓은 들의 젖줄이 되고 있다. 갈림길에서 심천 쪽으로 넘어가는 작은 언덕이 봉이둑이며 이 오르막 고개를 원재라고 한다. 원재의 논밭에서 기와편이 많이 발견되니 아마도 적등원이 있었던 곳으로 추측 된다. 중간말 농산물 집하장에서 웃말로 통하는 지하 통로가 있다. 이 통로에서 다리산 쪽을 향하여 꽁두골, 뱀마골, 고럼장골, 시거리, 베랭이, 불당골로 이어지며, 시거리 앞쪽에 큰배거리, 옛 철교 밑에 오배거리는 큰 길 나루였던 곳이다. 웃말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평달 농원 안내판이 있다. 다리산 중턱에 자리 잡은 이 농원은 규모도 크고 다양한 농사 활동을 하여 퇴직 후 귀농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원동 2리로 들어가는 진입로 옆에 보건지소가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다리산 아래에 자리잡은 담안이, 숯가마골은 함양박씨(咸陽朴氏), 선산곽씨(善山郭氏), 고령신씨(高靈申氏)가 주로 거주한다. 이들은 약 300여년 전부터 거의 동시에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해 지금까지 화목하게 살아왔다. 담안이는 원래 못안에 있는 마을(潭內)이라는 뜻인데 현재 경부고속 철도와 국도가 댐의 둑처럼 가로막혀 옛지명을 입증해 주는 듯 하다.

숯가마골에서 조금 올라가면 봉화터(월이산봉수지)가 있고, 여기서 달이산(다리산)을 올려다보면 두꺼비 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보이는데 마을 사람들은 두껍바위라 부른다.
신성시 되는 바위이며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다. 숯가마골 앞에서 서리고개 쪽으로 보이는 골짜기를 숯굴이라 부르는데 임진란 때 월이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서리고개를 끊을 때 승천 준비 중이던 용마와 장군이 죽어 검은 피로 물들었기에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숯골에는 이 용마의 무덤이라고 하는 말 무덤이 있다. 원동소류지는 1973년 축조되었다.

 

 

적등원루는 옥천군 이원면 금강(적등강)가 전망이 좋은 언덕에 세워졌던 누각이다. 1439 년(세종 21)에 군수 최선문이 사재를 내어 퇴락한 누각을 중수하는데 일반 백성에게 폐를 끼 치지 않고 중들의 모역으로 공사를 마쳤다. 길손들이 이를 찬양하니 옥천의 부로父老들이 이에 대한 글을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84) 에게 청하여 그가 기문을 적어 보냈다. 서거정 의 『사가집四佳集』에 「옥천군적등원루기沃川郡赤登院樓記」 85) 가 전하다.

 

沃劇郡 南紀之走集也 由京而之忠淸 由忠淸而之慶尙 使華行旅之往復 蹄轂曰相磨也 郡之東 南三十許里 有屬邑 曰利山 有江延袤 橫截數十里 曰其仕臨 其上有古院 曰赤登 實處逵道之樞轄 焉 大暑祈寒之時 盲風苦雨之日 行者之來止于玆 或値跋涉之難也 道途之晚也 牛馬之乏也 草竊 之虞也 則有休焉息焉 登覽焉 信宿焉 燠其寒 而凉其熱 其德於人 可少哉 第因營構歲遠 頹圮殆 盡 歲正統己巳 和城崔侯來作守 政修弊袪 一日 星駕適野 見赤登殘廢 嘆曰 豈有長民者 而忍視 不救 令行路無所於歸乎 慨然有重修之志 鄕之僧無着承侯意 普勸鄕閭 得財資若干 侯亦出私帑 以助其費 凡百締造 皆聽髡緇之募役者 無絲毫擾及南畞 經始於某年 斷手於某年 起樓三楹 宏敞 廣豁 又有行廚 爲止宿之所 昔之湫隘傾壤者 今則一何巋然也 行旅之道于此 皆謳吟思侯之德不 置 予按周禮 凡國十里有廬 三十里有宿 後世 十里一長亭 五里一短亭 皆所以接賓客也 國家之制 待王人使華 則於大道三十里 有一傳舍 有吏卒以掌之 待商旅 則於道里遠近 山川要害 量置院宇 募民爲主 給土田以復其役 是雖上下公私之分 其惠人一也 今傳舍 有主者 責有所歸 院宇則一無 提管者 往往至於顚覆莫之顧 此豈聖上優惠之本意耶 今侯爲政 拳拳及此 其知所先務者矣 嗚呼 行惠政 使行旅願出於道 雖古聖賢 亦有取於斯者矣 沃之父老 欲侈侯之德 求予言 僅書歲月以還 之 侯名善門 字某 繼侯而守 鄭使君承韶 亦有政聲云 蒼龍丙子

 

옥천은 번화한 고을로 남쪽 지역의 지맥이 집결하는 곳이다. 서울에서 충청도로 가고 충청 도를 거쳐 경상도로 가는 사신과 나그네가 매일 수없이 오가는 곳이다. 옥천군의 동남쪽 30여 리쯤에 소속 읍이 하나 있으니 ‘이산利山’이다. 강이 길게 뻗어 수십 리를 가로지르는데 ‘기사其 仕’이다. 그 강가에 오래된 역원驛院이 하나 있으니 ‘적등원赤登院’이다. 실로 큰 길의 요충에 위치하여 있다. 매우 덥거나 매우 추울 때, 거센 바람이 불거나 궂은비가 오는 날에는 길 가던 자들이 여기에 와서 머문다. 가는 길이 험난하거나 여정에 날이 저물 때, 짐과 사람을 실을 소와 말이 부족하거나 도둑이 걱정되면 여기에서 휴식을 하는데, 올라가서 구경도 하고 하루 이틀 묵어가기도 하며 추위를 녹이기도 하고 더위를 식히기도 하니,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적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지은 지가 오래되어서 거의 다 기울고 허물어졌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호는 사가정, 본관은 달성이다. 좌찬성을 냈고 문집으로 󰡔사가집󰡕이 있다.  서거정의 󰡔사가집󰡕 권2에 전한다. 원문과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의 자료를 실었다. 

 

기사년(1449, 세종31)에 화성和城 최후崔侯 가 수령으로 부임해 왔다. 정사가 잘 베풀어지고 폐단이 제거되었다. 하루는 수령이 들에 나갔다가 적등원루院樓가 잔폐한 것을 보고 한탄하 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이 있으면서 어찌 그냥 방치해서 길 가는 사람들이 쉴 곳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개연히 중수할 생각을 하였다. 고을의 승려 무착無着이 최후의 뜻을 받들어 고을 사람들을 두루 권면하여 재물 약간을 구했 고, 최후도 개인의 재물을 내어 그 비용에 보탰다. 건물을 짓는 일을 모집한 승려들에게 모두 맡겨 백성들의 농사일에는 조금도 피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 해에 시작하여 아무 해에 완공하 였다. 세운 원루 세 칸이 넓고 시원하게 트였고 또 행주行廚 를 두어 묵어가는 장소로 삼았다. 예전에 누추하고 좁고 기울어 무너져 가던 것이 지금은 그 어찌나 우뚝한지! 나그네들이 이곳에 들르게 되면 모두가 최후의 은덕을 칭송하고 사모하여 마지않았다. 내가 󰡔주례周禮󰡕를 살펴보니, 무릇 나라에는 10리마다 여廬를 두고 30리마다 숙宿을 둔다고 되어 있는데, 후세에는 10리에 하나씩 장정長亭을 두고 5리에 하나씩 단정短亭을 두었다. 모두 빈객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국가의 제도에 왕인王人 과 사신을 접대하는 데에는 큰 길 30리마다 하나씩 전사傳舍를 두고 서리와 역졸을 배치하여 관장하게 하였고, 상인과 나그네를 위해서는 거리에 따라 산천 의 요해처에 적절히 헤아려 원우院宇를 설치하고 백성 중에서 주관할 이를 모집하여 논밭을 주 어 그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이것이 비록 신분에 따른 차이가 있고 국가의 일과 개인 일의 차 이가 있기는 하나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오늘날 전사는 주관하는 이가 있어 책임을 지울 대상이 있지만, 원우는 한 사람도 관리하는 이가 없어 왕왕 기울고 넘어지는 데도 아무도 돌보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은혜를 넉넉히 베푸시려는 성상의 본뜻에 부합하는 것이겠는가. 이제 최후가 정사를 폄에 간절한 정성이 여기에 미쳤으니, 무엇을 우선 힘써야 할지를 아는 사람이다. 아아! 은혜로운 정사를 시행하여 나그네들로 하여금 그 길에 나가고 싶도록 하였으 니, 비록 옛 성현일지라도 또한 여기에서 취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옥천의 원로들이 최후의 공덕을 빛내고자 나에게 한마디 해 주기를 요구하기에 겨우 공사 과정의 내력이나 적어서 돌려보낸다. 최후의 이름은 선문善門이고 자는 아무이다. 최후의 후임 자로 부임한 사또 정승소鄭承韶 또한 치적으로 명성이 있다고 한다. 병자년(1456, 세조 2)

 

최후(崔侯): 조선 초기의 문신 최선문(崔善門)이다.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경부(慶夫), 호는 동대(東臺),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慶濂書院)에 배향되었다.  행주(行廚): 객관에 있는 임시 부엌으로, 나그네들을 위해서 음식을 마련해 주는 곳이다.  왕인(王人): 왕이 내려보내는 사신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