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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면 행촌리 경석조공적비(延豊面 杏村里 慶錫祚功績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연풍면 행촌리 경석조공적비(延豊面 杏村里 慶錫祚功績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3. 2. 23. 11:34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연풍향교옆에 자리하고 있는 청주인 애국의사 경석조선생의 공적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애국의사경석조공공적비愛國義士慶錫祚公功績碑)라고 적혀있습니다.

 

경석조는 1881년 6월 27일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연풍면(延豊面) 유하리(柳下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혜춘(惠春)이다.1914년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 구금되었다. 광복회는 대구에서 1915년 7월 결성된 이후 그해 12월 만주 지린(吉林)에서도 우재룡 ・ 손일민 ・ 주진수 ・ 이홍 등에 의해서 조직되었다. 1916년 서울을 중심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그 후 총사령 박상진이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서 체포되어 조직이 크게 타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노백린은 미주로, 김좌진은 만주로 망명하는 등 많은 인사가 국외로 탈출하였다.1919년에는 대동단(大同團) 충북 지단 단원이 되어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1924년에 다시 만주로 건너가 북간도(北間島) 룽징촌(龍井村)에서 고사연구회(古事硏究會)를 조직하였다.

 

1929년 7월 지린성(吉林省) 닝안현(寧安縣)에서 신민부(新民府) 군정파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무정부주의이념을 수용하며 조직한 한족총연합회의 중앙 총무부장에 선임되었다. 신민부는 1927년 12월 15일 군정파(軍政派)와 민정파(民政派)로 양분되었다. 신민부 군정파는 그해 12월 하순에 신민부를 해체하고 지린에서 참의부(參議府)의 김승학(金承學) 계열과 함께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였다. 혁신의회에서 군정파 출신인 황학수(黃學秀)는 군사부위원장, 정신(鄭信)은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경석조선생의 사진입니다.

 

한족총연합회는 공산주의 계열 인사들의 공격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한족총연합회 관할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습격 ・ 사살하기도 하였고, 한족총연합회 주석인 김좌진을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1930 ・ 1931년에 연이어 발생한 한족총연합회 핵심 인물인 김좌진과 김종진의 암살과 이을규의 체포 이후에는 한족총연합회의 조직 당시에 없었던 무정부주의자들과 대종교적 민족주의자들 간에 갈등도 생겨났다. 결국 대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이 1931년 여름에 한족총연합회를 이탈함으로써 해체의 지경에 이르렀다.

 

연풍면 각지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한군데 모아 놓았습니다.

 

한족총연합회를 이탈한 대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은 홍진 ・ 지청천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한국독립군 등 민족주의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1930년에 북만주 한국독립당 기밀부장에 피선되었다. 중앙위원장은 홍진이었고, 각 위원장은 총무 신숙(申肅), 조직 남대관(南大觀), 선전 안훈(安勳), 군사 이청천(李靑天), 경리 최호(崔灝), 감찰 이장녕(李章寧)이었다.한국독립당은 한국독립군을 조직하고 북만주 지역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중앙위원회 결의를 통해 한국독립군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중국의 리두(李杜) ・ 딩차오(丁超) 등이 이끄는 지린자위군(吉林自衛軍)을 비롯하여 카오펑린(考鳳林) ・ 우이청(吳義成) 부대 등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서란현전투(舒蘭縣戰鬪) ・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 경박호전투(鏡泊湖戰鬪) ・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 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1944년에는 중국국민당에 입당해 항일 활동을 펼치는 한편, 만주 지역에 이주한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광복 후 1949년 2월에는 반민특위(反民特委) 충북 책임자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한국독립운동집필사전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