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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면 연주리 독락정 편액(安南面 蓮舟里 獨樂亭 扁額)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안남면 연주리 독락정 편액(安南面 蓮舟里 獨樂亭 扁額)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3. 9. 21. 12:18

독락정의 뒷면을 찍어 보았습니다.
1970년 후손에 의해 작성된 독락정추모기입니다.

 

안남면 연주리 독락정마을에 있는 독락정에 걸려있는 편액입니다.독락정 추모기를 비롯하여 이 곳을 찾았던 문인들과 후손들의 편액이 수점 걸려 있습니다.

 

독락정 현판입니다.

독락정 獨樂亭이라는 현판은 초계인 주몽득이 독락정을 세울 때(1607년) 당시 옥천군수 심후가 썼다고 전해집니다.

 

안남면 연주리 독락정(安南面 蓮舟里 獨樂亭) (tistory.com)

 

안남면 연주리 독락정(安南面 蓮舟里 獨樂亭)

독락정은 1998년 6월 26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절충장군중추부사를 지낸 주몽득이 1607년(선조 40)에 세운 정자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방 1칸과 마

king6113.tistory.com

숭정기원후오무자 (崇禎紀元後五戊子)(1888년) 박제응이 쓴 편액입니다.

독락정 중수기

갑신(甲申=1884년) 가을에 내가 이 고을 군수(郡守)로 왔었는데 하루는 유생 3인이

와서 보기를 청하여 섬돌앞에 이르렀는바 시골사람의 의복을 입었으나 심히 위엄스럽고

거동이 안정되었다. 당상에 올라 척분을 따져 이야기하고 보니 나주박(羅州朴)씨는 곧

주(周)씨의 외손(外孫)이었다. 때가 지나도록 담화를 하고 떠나기에 임하여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집에 한 자그마한 계정(溪亭)이 있는데 곧 8세조께서 지으신바

가족가운데 여러제자들이 강학(講學)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잔약한 후손들이

불초하여 선대의 유적을 능히 지키지 못하고 사방으로 풍우(風雨)가 들이쳐 유람할 장소가

되지 못하나 또한 산수의 락(樂)이 없지 않사오니 공무(公務)에 여가가 있으면 한번 오셔서

회포를 풀어 보시지 않겠는지요."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기뻐서 몇일 후에 한두 관동을

데리고 한정(漢亭)을 찾아가 섬돌을 두루 살펴보니 다만 네 기둥의집에 지나지 않지만

좌우로 도서가 있고, 벽 위에 또한 전 군수(前 郡守) 심후(沈候)의 편액과 김후(金候)의

율시가 걸려 있으며, 겹겹이 쌓인 산봉우리가 더없이 푸르게 창 밖으로 벌려 있고, 띠를

두른듯 긴 강물이 섬돌앞을 바짝 흘러 자못 고기노는 것을 볼 수 있는 경관의 즐거움이

있어 가히 이르되 산골의 한 명승이라. 하룻밤을 자고 돌아와 매양 다시 가서 놀려는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금년 봄에 그 종손 주채준(周采俊)이 여러 일가들과 의논하여

재목을 구하고 공인(工人)을 가려 이 정자를 중수할제 서까래의 썩은 것을 다시 바꾸고

기와의 깨진것을 갈아 끼우며 그 연못의 더러운 것을 파내고 그 원림의 더러운 것을

베어 내는등 역사(役事)를 시작한지 넉달만에 마쳤으니 주군은 가히 선업(先業)을

잘 이은 사람이라 이르겠다.

주서(朱書)가운데 주사공(周嗣恭)이란 분이 있어 그 선대부 휘유공의 학고제를 중수하여 종족의

자제들을 가르쳤는바 주부자(朱夫子)께서 그 명을 지었는데 이제 주(周)군이 이 정자를

중수함이 주사공의 학고제(學古齊)로 더불어 한가지인 것 같고 또 그 씨족(氏族)이 같으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인가?

주(周)군의 청(請)을 중(重)히 여기어 사양하지 못하고 이렇게 기술(記述)하노라.

숭정기원후5 무자 1888년 중추 금성 박제응 기

(崇禎紀元後五 戊子 1888年仲秋 錦城 朴齊應 記)

 

상지8년(1808년)에 걸린 편액입니다.조선(朝鮮) 순조(純祖) 8년을 의미합니다.상지란 임금이 즉위한지 8년째 되는 무진년을 찾으면 됩니다.

차판 상운

이곳 풍치(風致)는 옥천의 으뜸인데 주인(主人)이 아름다운 루대(樓臺)를 일으켰도다.

높다란 산이 앞에 임하고 북소리는 물위에 울리도다.

좋은 술은 도연명(陶淵明)의 취미요, 아름다운 꽃은 도진(道眞)의 배와 같도다.

이 가운데 아름다운 멋이 있는데 정자에 올라 저문 산을 바라보네.

주씨(周氏)가 의장(義庄)을 개척한바 락호(樂湖) 물가의 독락정(獨樂亭)이로다.

술잔을 대하여 넉넉함을 알고 책상앞에 글 읽느라 열중하도다.

즐겨 놀면서 달빛을 따르고 맑은 정취는 배를 타고 놂이로다.

황정수(黃庭竪)의 시첩을 다 읽고 백석(白石)의 물가에서 노래를 부르노라.

자신을 온전히 깨달은 곳에 산과 물을 즐기는 정자(亭子)로다.

굽이치는 물은 물결마다 반짝이고험한 바위는 날날이 뾰족하네.

찻잔은 옥쟁반처럼 단장했고 술잔은 뱃머리처럼 뾰족하도다.

즐거운 놀이 후일을 기약하고 갈리는 길에 저문 구름 오락가락.

당산(唐山)은 높다랗고 유강(杻江)은 질펀한데 이곳에 날을듯한 한 루대가 있도다.

꽃망울은 물속에 맑게 비치고 그림같은 현판은 부처머리 같도다.

나무그늘 휘늘어져 연자매와 같고, 흥겨운 술잔치 작은배에 무르녹네.

거문고소리 맑기 그지없는데 빈들거리며 시읆고 모래톱에 노닌다오.

주군(周君)의 빛난 문벌 낙양에서 비롯하여 족려의 동국에 무릇 몇 곳인가?

충효로서 성암(省菴)은 한수 남쪽에 으뜸이요 문장로 림은(林隱)은 바다 동쪽에 으뜸일세.

달빛아래 안촌(安村)의 집이 감춰있고 구름에 닿을듯 락수(樂叟)의배는 유유히 떠가네.

오늘 유정(遺亭)에 모두모였는데 시읆는 이 경치 호주(湖洲)에 뒤질소냐.

룡제(龍劑)에 향기무르녹아 옥판(玉板)에 뜨는데 시를쓰며 홀로즐기는 최고의 정자로다.

지형은 남쪽으로 열려 구산(鳩山) 입구(入口)요, 물결은 가운데로 나뉘어 오수(驁水)의 머리로다.

맑게씻은 메벼는 가마솟에 옮겨지고 서리맞은 붕어는 고깃배에 가득하다.

서쪽에서 와서 꽃구경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종일토록 배회하며 여뀌밭에 앉았네.

금호의 서쪽에 신선을 부르던 루대가 바로 이곳이라오.

항상 뜨는 달은 루대 아래를 비취고 느린 바람은 섬 앞에 부누나.

신령스런 지역에 독락정이 있어 덧없이 놀며 술잔을 기울이네.

천지사방이 별세계(別世界)인데 마치 물 위에 뜬것 같도다.

1808 무진 4월 21일.상묵산인 경주 김노정 저(常默山人 慶州 金魯定 著)

 

추 음(追唫)

한 농막 선음(先蔭)이 드리운 곳에 백학(白鶴)은 떠나고 다락(루(樓))만 홀로 남았네.

가을은 련암(蓮岩)속에 저물고 봄은 금강(錦江)위에 깊어가도다.

책상위에 사마(司馬)의 붓이 놓여있고 문 밖에 계응(季鷹)의 배가 매어 있도다.

선조(先祖)의 행락(行樂)을 잇지 못하고 멀리 바라보며 물가에 눈물을 뿌리노라.

후손 채위(後孫 采渭)

정자는 한 고을의 명승지로서 명망이 환선루(喚仙樓)와 버금하리.

강물은 굽이쳐 삼면(三面)을 휘감고 산은 휘돌아서 머리를 들었도다.

촌노인은 술병을 들고 가는데 관리(官吏)는 고깃배를 점검하누나.

아까우이! 가을 해가 저뭄이여, 말(馬)을 멈추고 물가에 앉았도다.

김인순 인서(金麟淳 仁瑞)

독락정기

관성(옥천) 남쪽에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당산(唐山)이요 당산 양지바른곳에 물이있으니

이름하여 락호(樂湖)이며 락호위에 정자(亭子)가 있으니 이름하여 독락정이다.

어아! 나의 선조 진사 한(進士 漢) 호 안촌(安村)공께서 안촌에 터를 잡아 살면서 일찌기 학업을

닦으며 덕(德)을감추어 출사(出仕)하지 않고 김문정공(金文正公) 하서(河西)선생으로

더불어 동년(同年)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시어 평소에 도의(道義)로서 서로 깨우치는 벗이

되었다. 하서선생께서 안촌공에게 시(詩)를 지어 주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옥천(沃川)은 내가 지났던바 산수(山水)가 빼어나고 그윽 하였네.

뛰어난 인물(人物)은 산천(山川)의 령기(靈氣)거니 문사(文士)로 명류(名流)가 많았도다.

이름이 오르니 일방(一㭶)이 더했고 잔을 들매 백두(白頭)와 같았네.

서로 종유(從游)하기 서너달에 정의(情誼)가 깊게 무르녹았네.

마음을 서로 통하여 진심을 밖에서 구하지 않았도다.

서울에서 그대를 보내고 호서(湖西) 길에 걸음을 돌리리.

만남이 다시 어느 곳이런가? 날저문데 홀로 서성이네.

또 행촌 김세마(杏村 金洗馬)가 안촌(安村)공의 시를 화답 하였는데 그 시는 아래와 같다.

안촌의 편안한 집은 바로 그대의 거처이니, 오동달, 버들 바람에 고서(古書)를 외우시나.

선대로 전해온 사업은 오직 시예(詩禮)이거니, 성인(聖人)을 잇고 후생(後生)을 계도함에

학문은 남음이 있으리.

먼 훗날 후학으로서 이 시(詩)를 읽은진데 가히 안촌공의넓은 학문과 독실한 행실을 알 수 있으리라.

그러나 공은 홀로 인몰(湮沒)되어 일컫지 않으니 가히 슬픔을 이기겠는가?

안촌공으로부터 3세(世)를 전하여 몽득(夢得)은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승진했는데

공의 묘비(墓碑)에" 공(公)은 천성이 인후(仁厚)하여 일찌기 학업이 드러나니 향당에서 칭선(稱善)하였다.

공이 독락촌에 살았는데 마을 서쪽에 정자를 지어 정자이름을 독락정(獨樂亭)이라 하였다.

정자아래로 강물이 질펀하게 흐르고 정자위로는 바위산이 높게 빼어났으므로 공께서 무척 사랑

하시고, 밤낮으로 노닐며 시(詩)를 읊으시니 세상에서 독락옹(獨樂翁)이라 불렀다." 고 하였다.

그로부터 1~2백년의 세월이 흘러 정수(亭樹)가 퇴락되었다.

신묘 중춘 기망(辛卯 仲春 旣望 = 1771. 2. 16.)에 대종부 윤효(胤孝)씨와 3종숙 익신(翊臣)씨와 종숙

종신(宗臣)씨가 선업을 잇는 뜻이 성실하시어 재물을 모아 중건(重建)하실제, 여러 일가들이 또한

역사(役事)를 감동(監董)하여 예전대로 이루었다.

한편 학전(學田)을 따로 장만하여 유생(儒生)들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이곳에서 학문을 강론토록

하였으니 이는 고인(古人)의 의장(義庄)에 뒤지지 않고 또한 당시 어느 사람의 좋은 정자에 내리지

않었던바,시인들이 경치를 찾아 놀며 시를 읊고 고깃배가 때마추어 래왕(來往)하였다.

또한 서쪽에 척수대(滌愁臺)가 있고 동쪽에 중락정(衆樂亭)이있어 이 정자의 풍경이 이를

겸하여 더욱 아름다웠다.후세 사람들은 능히 이를 이어 더욱더 중수 할 진데 백세(百世)토록

전하여 본을 받으리라.

성상10년 1786년 병오 맹춘 독락옹 5대손 명국 근서

(聖上十年 1786年 丙午 孟春 獨樂翁 五代孫 鳴國 謹書)

송병서가 쓴 편액입니다.

 

근차판상원운

옥천(沃川) 동(東)녁에 천추(千秋)의 독락(獨樂)이 으뜸인 루대(樓臺)로다,

흰 모래톱에서 수면(水面)에 고기(魚)노는 풍경을 보는 락(樂)으로

하루밤 잠자고, 달(月)이 뜰때 어옹(漁翁)이 배를 띄웠도다.

어제 풍류객(風流客)의 산(山)울리는 풍악 흥(風樂 興) 소리를 돌이켜 생각하노라.

꽃이 만발하여 물가를 물들이네.

송휘로(宋徽老)

 

독락(獨樂)의 뜻을 누가 알건가? 대대(代代)로 전하며 다락(루(樓))을 잊지 못하도다.

봉우리는 북두칠성 아래 가깝고 마을은 갈마강(渴馬江) 머리에 깊도다.

꽃이 떨어져 물을 붉게 적시고 달빛은 배에 가득히 비추도다.

내 마음에 좋아하는 바를 쫓아 낚시를 드리우고 물가에 앉았도다.

원손 재철 (元孫 載哲)

 

숭정기원후오경인(崇禎紀元後五庚寅)1890년에 작성된 편액입니다.

율시기문

고을의 주암강(舟岩江) 위에 독락정(獨樂亭)이라 일컫는 곳이 있으니 곧 주씨(周氏)의 옛 유물이다.

전년 봄에 해가 오래되어 퇴폐 함으로써 뜻을 모아 개수(改修)하니 서가래와 기둥이 장대하고 아름다웠다.

이 강(江)의 위 아래로 옛적에 정각의 절승이 많았으나 하나도 왕성함을 볼 수 없었는데 오직 이 정자만은

여러 세대(世代)를 지나도록 높다랗게 전하고 있으니 가히 주군(周君)의 선업(先業)을 잘 계승한 뜻을 보겠도다.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내가 일찌기 한번 등임(登臨; 郡守)하여 바삐 지난바 지금 수십년이 되어 능히

잊지 못한다. 매양 생각하기를 다시한번 찾아가 마음껏 두루 살피고자 하였는데 늙고 병들어 가히 마음대로

못하고 다만 앉은뱅이의 탄식만 있을 따름이다. 드디어 고 군수(故 郡守) 김공(金公)의

판상운을 차운하여 쓰노라.

옥천(沃川) 고을엔 승경(勝境)이 많은데 홀로 이 이름난 루대(樓臺)가 있도다.

가파른 절벽은 산(山) 어구에 의지하고 먼 전망은 물(水) 머리를 눌렀도다.

봄바람에 노는 이의 걸음이 잦고 밤달(夜月)에 어옹(漁翁)의 배가 떴다.

어찌 강호(江湖)의 놀이를 약속하겠다! 함께 회오리섬을 찾자구나.

1890년 경인 춘 입재병부 송근수 제 (1890年 庚寅 春 立齊病夫 宋近洙 題)

 

차운

맑은 물 높은 산 아래 덧없는 한 다락(루(樓))만 남아 있도다.

늙은 용(龍)은 석굴(石窟에 몸을 감추고 목마른 말은 강두(江頭)에 물을 마시도다.

멋있는 즐거움 풍월(風月)을 쫓고 편안한 한가로움 연주(蓮舟)에 부쳤도다.

선세(先世)의 뜻을 잇고자 하는바 대지팡이 짚고 긴 물가를 거니네.

후손 영응(後孫 永應)

추음

물 푸르고 모래 흰 이곳에 글읽는 루대(樓臺)가 대대로 전하누나.

처마끝에 평야가 바라보이는데 조촐한 건물이 강머리에 섰도다.

맑은 취미는 도연명(陶淵明)의 국화요, 깊은 정은 섬계(剡溪)의 조각배로다.

나의 행락(行樂)할 곳을 쫓고자 낚싯대 매고 물가를 거닌다오.

후손 권응(後孫 權應)

 

근차판상운

홀로 은인(隱人)의 락(樂)을 얻어 승지(勝地)의 루대(樓臺)를 거듭 수즙(修葺)하였도다.

물러난 관리(官吏)가 풍류(風流)의 흥(興)을 타고 옛 재상(宰相)이 노는 집을 얻었도다.

산골(山谷)이 깊어 겨우 말(馬)을 돌리겠고 바위가 기이(奇異)하여 배 매기 좋도다.

주공(周公)따라서 은거(隱居)하여 내 이곳에 살고 싶으이.

침천산인고 송응수 枕泉散人稿 宋應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