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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면 교암리 송시도묘지(水汗面 敎岩里 宋時燾墓地)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수한면 교암리 송시도묘지(水汗面 敎岩里 宋時燾墓地)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4. 2. 4. 08:19

교암리 동네에서 바라다 보면 커다란 무덤이 보입니다.은진인 송시도의 무덤입니다.무덤앞에는 신도비가 있고 옆에는 근래에 지은 재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송시도(宋時燾) 1613(광해군 5)~1689(숙종 15) │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은진 (恩津), 자는 성보(誠甫), 호는 세한재(歲寒齋)이다. 아버지는 영의정에 증직된 송갑조(宋甲祚),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로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의병장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송갑조의 4형제 중 넷째 아들로 옥천군 구룡촌 외가 에서 태어났으며,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동생이다. 부인은 월성 이씨(月城李氏)로 이복익(李復益)의 딸이다. 그는 주자학(朱子學)에 밝아 소우암(小尤庵)이라 불렸 으며, 형인 송시열과 연산(連山)의 사계 김장생(金長生)에게 수학하였다. 타고난 품성과 기질이 순순하고 아름다웠고 어릴 때부터 효도와 우애가 돈독 하였다. 1659년(효종 10) 향천(鄕薦)으로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그 뒤 1662년 장흥고(長興庫) 주부(主簿)로 승직하였다. 그해 가을에 영산현감(靈山縣 監)으로 나갔는데 1663년(현종 4)에 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그만 두었다. 가을에 다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재직하다가, 1664년(현종 5) 봄에 청안현감 (淸安縣監)에 제수되어 근무하였지만 얼마 후 병으로 그만두었다. 1666년 봄에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고, 여름에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고, 가을에 다시 감찰이 되었다가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로 옮기고, 겨울에는 익산군수(益山郡守)에 제수되었다. 1669년(현종 10) 익산군수로 재직하던 중 익산에 있는 영장(營將)을 여산(廬山)으로 옮겨줄것을 주청(奏請)하여 성사시켰다. 1672년(현종 13) 겨울에 전라도 장성부사(長城府使)로 부임하여, 필암서원 (筆巖書院) 등을 세워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를 배향하고 학자를 초빙하여 백성을 가르쳐 문풍을 진작시켰다. 1675년(숙종 1) 서인 세력의 실각으로 형 송시열이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함께 따라가 시중을 들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정변으로 노론이 집권하자 사첨시(司瞻寺) 주부(主簿)·장악원 첨정(僉正)·군자감 정(軍資監正)·제용감정(濟用監正) 등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 후 보은군 삼승면의 금적산(金積山) 아래 탄금대에 세한재(歲寒齋)와 일경당(一經 堂)을 짓고 후진교육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때 충암 김정, 대곡 성운을 제향하고 있는 상현서원(象賢書院)에 동주 성제원과 중봉 조헌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689년(숙종 15) 형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자 함께 따라갔다가 그곳에 서 풍토병(風土病)으로 돌아와 공주에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보은 차마동 (車馬洞, 현재 수한면)에 장사지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세한재유고』가 있다. 묘소는 보은군 수한면 교암리에 있다. 홍석주(洪奭周)가 1827년 건립하였고, 후손인 송치규(宋穉圭)가 쓴 묘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