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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면 광덕리 조덕공공적비(文光面 光德里 趙德恭功績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문광면 광덕리 조덕공공적비(文光面 光德里 趙德恭功績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4. 2. 19. 06:58

충신(선무원종공신)형조참의순창조공덕공공적비( 忠臣(宣武原從功臣)刑曹參議淳昌趙公德恭功績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조덕공(趙德我》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자는 사원 본관은 순창이다. 한성좌윤 조승의 둘째 아들이며 충신 조복의 종질이다. 괴산군 송평등에서 태어났으며 뒤에 충주시 노은면 수룡리로 옮겨 살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벗과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으며 율곡의 문하에 있었고 유자(儒者)로 이름이 났다. 또한 마음이 활달하여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재덕과 지모(智謀)가 출중하고 용맹하여,일찍이 붓을 던지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배웠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올라 선전관(宣뿐官)이 되었다가 호조정랑(戶불1E卽)을 지냈다. 1584년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3년 후에 복직하여 훈련주부(訓諫초簿)에 있다가 양지현감이 되었다. 이곳에서 충성을 다하여 선정을 베풀고 임기를 마쳐 돌아오려고 하니 현민들이 다시 머물러 있기를 원하므로 1년을 더 다스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병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충주가 함락되고 조정은 북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이때 조덕공은 “봉록을 받는 신하로서 나라의 어려움에 당하여 어찌 구차하게 살 수 있겠는가”라고 결심하고 아우 덕검과 함께 초래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워 여러 차례 전공(戰功)을 세웠다. 그런데 하루는 적군의 기습을 당하여 적과 맞서 다가 아우인 덕검 이 전세 불리함을 느끼고 도망하였는데 조정에서 죄를 묻자 그는 상소를 올려 자기의 공을 감하여 아우의 죄를 사하여 줄것을 호소하였다. 조정에서는 당시의 상황이 또한 그러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음을 알고 특별히 죄를 풀어 주었다.
이때에 숙부인 조복 또한 늙고 병든 몸이었지만 의병을 일으켜 충주 남쪽 우목의 들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에 그는 정예 군사를 이끌고 직접 적진에 뛰어들어 숙부의 시신을 안고 돌아와 장사를 치렀다. 충과 효와 우애 세 가지를 겸비하였으니 조야(朝野) 간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전란이 평정된 뒤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충주시 노은면 수룡리 에 돌아와 술을 벗 삼다가 여생을 마쳤으니 그 몰년은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선무공신의 호(號)를 내리고 통훈대부형조참의(通訓大夫刑曹參議)를 증직했다.문광면 광덕리 칠충사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묘소는 충주시 노은면 부용수류동에 있다.【참고문헌】『괴산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