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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면 윤령 효자각(北二面 尹聆 孝子閣) 본문
윤령(尹聆, 1543~1593)은 조선시대 효자이다. 본관 파평. 자 언성(彦聲), 호 모암(慕庵). 청원군 북이면 내추리출신. 파평부원군 좌익공신 공간공(恭簡公) 윤형(尹炯)의 현손으로 부친은 충좌위 부사관 사화(思和), 어머니는 행주 기씨(幸州奇氏)이다.
8세 때에 부친과 백씨의 상을 함께 당하여 3년간 묘막살이를 하였다. 15세 때 또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분향하며 하늘에 축원하기를, “이 몸이 대신 죽어서라도 어머님의 병환만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빌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해 8월에 별세하니 선산 내추리에 합장하였다. 공이 다시 시묘를 살 때 그 효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어디선가 까치와 까마귀 한 쌍이 묘 앞 나무에 날아들어 수시로 울고 그치기를 계속하다가 3년이 되어 날아가니 그 때 사람들은 그 나무를 가리켜 “효자새나무”라고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매일같이 성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고종대에 유림들이 의논하여 전후사를 적어 한 권의 포양문(襃揚門)을 의정부에 올렸지만 20년이 지나도록 포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고종 20년(1883) 왕이 행차할 때 사손 윤익채(尹翼采)가 위문 밖에서 징을 울리고 알려서 왕에게 사실을 고했다. 왕은 예조판서 윤병필과 우부승지(右副承旨) 홍승헌에게 사실을 검토하게 한 후 마침내 교지를 내려 청원군 북이면 내추리 1구에 정려를 명했다.
이 효자각은 조선 고종 20년(1883)에 파평인(坡平人) 사과(司果) 윤령(尹聆, 1482∼1533)의 효행을 기리어 나라에서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효자각은 1984년 중수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 효자문 편액을 걸었다. 그리고 건물 안에 1945년에 지은 정려기(旌閭記)가 걸려 있으며, 밖에는 "효자지려(孝子之閭)"라고 쓴 현판을 달았다. 효자각 앞에는 정려기의 국역비(國譯碑)가 있다
북이면 내추리에 위치하고 있다 sk북이주유소 옆길을 따라 들어가면 문화마을이 나타난다 문화마을 끝 도로가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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