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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성면 관정리 신중엄신도비(琅城面 官井里 申仲淹神道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낭성면 관정리 신중엄신도비(琅城面 官井里 申仲淹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4. 3. 7. 08:06

증좌찬성고령신공중엄신도비명
고금을 통하여 수(壽)의 원리를 말씀한 중에 공자같은 분이 없었으니 그 큰 뜻은 사람의 생리란 직(直)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직이란 천지생생(天地生生)의 이치로 곧 인(仁)이다. 세상이 그릇되고 풍속이 점점 박해짐에 따라 인간들이 병고에 시달려 상하게 되고 그중 혹간 직없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요행으로 면한 것이니 그것은 수(數)로 칠 것도 되지 못한다.
그 직(直)과 그 진리를 잘 보전하여 인자수(仁者壽)의 보(報)를 받은 분이 계시니 증좌찬성 신공이 곧 그분이다. 공의 휘는 중엄(仲淹)이요 자는 희범(希范)이며 경상도 고령에서 갈려 나왔다. 시조 성용(成用)은 고려조에서 군기감(軍器監) 벼슬을 하셨고 그 후세에 연이어 명문(名聞) 있는 분이 많았으니 휘 장(檣)에 이르러 공조참판과 집현전제학을 지내셨고 증 영의정에 글씨 또한 저명했으며 이 어른이 또한 의정부 영의정 고령부원군 휘 숙주(叔舟)를 낳으셨는데 문장사업이 한 때를 울렸고 이분 또한 내자시정(內資寺正) 증우의정 휘 형(泂)을 낳으시니 실로 시조 군기감공으로부터이 9세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타족과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어른이 또한 한성참군(漢城叅軍) 휘 광윤(光潤)을 낳으시니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에 오르시고 그 후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시었다.이분이 다시 휘 서(溆)를 낳으시니 증이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를 하셨으며 곧 공의 황고(皇考)이시다. 양세께서 추존되심은 모두 공의 영귀(榮貴)에 말미암은 것이다. 비(妣)는 증정부인 강씨이시니 진주 명문으로 성환찰방(成歡察訪) 휘 황의 따님이시다. 1522년(중종 17, 임오년) 3월 14일 축시(丑時)에 출생하셨는데 공은 일찍이 불행하시어 네 살때 어머님 여의시고 16세 때 아버님 여의시어 외롭고 고생으로 자라시면서도 과학(科學)공부에 힘쓰시더니 을사세변(1545년 을사사화)을 보신 후 부터 과거의 뜻을 끊으셨고 또한 유상국(柳相國) 관(灌)과는 질서(姪壻)의 인척이 되므로 일찍부터 기중(器重)의 인정을 받아 막 천용(薦用)의 기회를 기대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그분이 참화당하여 원지로 유배되니 공은 마침내 솔가남귀(率家南歸)하시어 청주 향장(鄕庄)에서 왕부공(王父公)을 봉양하면서 일생을 마치려 하셨는데 1550년 (명종 5, 경술년)에 공의 종조부 낙봉공(駱峰公, 기재공 휘 광한)께서 공의 재주와 국량 있음을 알고 그의 서랑(壻郞) 판서 조사수(趙士秀)와 상의하여 음직으로 동궁 선수감역관(繕修監役官)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되자 그로 인해 중건의 공역을 맡았으나 준공에 앞서 왕부공 상을 당하여 사임하고 환향하시니 1554년 (명종 9, 갑인년) 겨울의 일이다. 삼년 탈상과 아울러 전의 공로로 곧 군자감 직장에 임명되고 다음 예빈사주부로 승진하고 이어 사헌부감찰로 옮기시니 각사(各司)의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감히 속이지를 못 하였다.

 

1561년(명종 16, 신유년)에 용담현감(龍潭縣監)으로 나가 5년 간 계시는 동안 고과(考課)에 가장 낮은 성적이라 하여 파직당한 바 있으나 공의 잘못은 아니다.1571년(선조 4, 신미년) 가을에 복직되어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부임하니 상주는 실로 영남의 우두머리로 사무가 복잡한 고을이라 상관 보좌하여 섬기기도 어렵고 외국손님 접대에 환심 얻기도 어렵다고 호(号)가 난 곳이었는데 마침 군적의 큰 이동이 있어 몹시 시끄러웠다. 공이 그 고을 여러 일을 대리로 처리할 때 봉사(奉使)의 위엄도 두려워 하지 않고 진정시킨 바 많으니 그 주민들은 많은 혜택을 받은 바 있다. 
업무 평가로 곧 교체되어 남부(南部)와 종부심(宗簿寺) 주부를 역임하시고 상서원(尙瑞院) 판관과 장예원(掌隸院) 사의(司議)를 거치시고 순천군수로 승진 제수되니 1578년(선조 11, 무인년) 여름이다. 부임 초부터 사람의 도리를 바로잡고 상하 질서를 세우며 거문고와 음악 그리고 사랑으로 행정의 근본을 삼으니 그 군민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기도 했다. 1584년(선조 17, 갑신년) 겨울에 사옹원 판관을 거쳐 수안군수로 부임하여서는 그 전 순천군 때와 같이 하셨고 임기 만료로 다시 내직인 상방판관(尙方判官)으로 들어가셨는데 그 이듬해 미미한 일에 연좌되어 파직된 바 있다.

 

1591년(선조 24, 신묘년)과 1592년(선조 25, 임진년) 양년에 연이어 계모(繼母) 계조모(繼祖母) 상을 당했고 1595년(선조 28, 을미년)에 탈상하니 곡산현감(谷山縣監)으로 부임하여 재임 수년에 공적시행착오로 인해 탄핵을 받았으나 곧 석방되니 그것은 공의 노쇠를 딱하게 여겼던 것이다. 1598년(선조 31, 무술년) 봄에 명나라 지원병이 몰려오는데 군량공급이 계속되지 못하자 공은 집의 자산을 내어 보충토록하니 조정에서는 그 성의를 아름답게 여겨 상으로써 통정대부 위계로 높여 주었고 1601년 (선조 34, 신축년) 겨울 나이 이미 80에 이르시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서 특별히 가선대부 동지 중추부사로 높여 주었으니 나라에서 연치높은 노인을 높여주는 은전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여러 자제들이 음식과 음악으로 잔치를 베풀고 공과 같이 수직(壽職)에 오른 여러 노인들을 청하여 한자리에서 즐기게 하니 그 한때 이름 높은 공경대부들이 모두 와서 헌작한 바 있다. 이로부터 매년 봄 가을에 잔치 베푸니 고관대작들 모두 참석하고 당시 문장대가들은 모두 축하시를 보내니 마침내 여러 권의 책을 이루었으니 실로 난리 후 아직 있지 않았던 성사(盛事)라 하겠다. 공은 일찍부터 천식증이 있어 날씨가 추워지면 괴로워 하시드니 이에 1604년(선조 37, 갑진년) 12월 27일에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83세이시다.

 

이듬해 1605년(선조 38, 을사년) 3월16일에 청주 동쪽 묵정 건좌손향원(乾坐巽向原)에 장사 지내니 선영의 영역에 따른 
것이다. 공은 천품이 온수하고 효성이 출천하여 그 선친 참판공이 전염병으로 돌아 가심이 일시적으로 야외에 초빈(草殯)으로 모시니 일반사람 모두 피해 달아나되 공은 그 당시 10여 세 소년이었으나 밤낮으로 홀로 앉아 지켰는데 가끔 뱀이 그 빈소 옆에 서리고 있다가 침범할 때도 있었으나 조금도 무서워 하지 않고 빈소를 지켰다. 그리고 계모와 계조모를 섬김에 화한 얼굴빛과 상냥한 말로 항상 뜻을 받들었고 연령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으되 한평생 동안 시종 한결같이 영양식(營養食)을 갖추어 봉양했다. 
그리고 계조모, 계모 소생의 삼촌이나 아우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여 보호하여 모두 성가토록 보살펴주니 이간(離間)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대 제사를 모심에 모두 주자가례에 따랐고 아무리 노쇠했다 하더라도 제사 때는 꼭 친히 행사(行祀)하셨다. 돌아가시기 1년 앞서서는 부득히 참사(參祀)하게 되지 못하자 제삿날밤에는 반듯이 앉아서 밤을 새우곤 하셨다. 임진란 때 사대부 거의 조상의 신주를 보존한 집이 적었지만 공만은 홀로 신주 모두를 완전히 모셨다. 산골로 피난할 때도 재물이나 가산같은 것은 돌보지 않고 오직 신주 모심에 온 정성을 다 하셨다. 공이 중종 때 태어남으로써 중종 이하 여러 임금 기제날에는 재계와 근신하기를 일생 동안 변치 않으셨다. 여러 친척 종당에도 힘자라는 데까지 보살펴 주고 혹 찾아오면 그 유무를 묻지 않고 음식을 접대하여 곤궁한 일가로 집이 없는 사람에게는 터를 나누어 주어 살게 해 주며 오랜 세월 하루같이 기쁘고 즐겁게 하고 혹 그 소행이 상도에 벗어나는 때가 있다 하 더라도 그 기미를 조금도 얼굴빛이나 언성으로 나타내지 않으니 그를 듣는 사람 모두가 따를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젊었을 때 일찍이 가까운 친척집의 상사(喪事)에 호상(護喪)한 적이 있었는데 그 상가는 살림은 넉넉하나 주관할 자녀가 없어서 공이 모든 장사 비용을 자세히 기록해 두니 그 집의 한 노비가 공이 애쓰신 것을 감사하여 진주 둬오큼을 종이에 싸서 공의 옷소매 속에 넣어주는 것이 아닌가. 공은 이를 꾸짖고 돌려주었으니 실로 공은 얻어서는 안될 것은 이같이 엄하게 경계한 것이다. 여러 고을에서 원(員)을 지내셨으나 그 소임을 마땅히 할 따름이요. 항상 인정을 핑계로 엉뚱한 칭찬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으셨다. 대체로 민력애양(民力愛養)과 관곡비축(官穀備蓄)을 위주로 하고 용도에 응하여 공용하는 외에는 절약 또 절약하여 재임하시는 곳마다 돈과 곡식이 남아돌아 일반적으로 베풀고 조치하는 데에 두고두고 오랫동안 쓸만 하니 교체하여 인계받는 사람마다 아무 이의없이 오직 칭찬하고 감탄할 뿐이었고 군민들은 공을 떠받들기를 부모와 같이 하였다. 더욱 풍속 순화의 근본에 뜻을 두어 문묘의 중수 개즙(改葺)과 아울러 제기, 제복에 이르기까지 일신하였고 주민 중에 효행 이 있는 자는 반드시 부역을 면제해 주고 식량까지 줌으로써 그 기풍을 장려하셨다. 
또한 관리사무에 통달하시고 법문에 밝으시어 무릇 소송사건 때 공의 재판을 한 번 받으면 감히 이의하는 자가 없었고 이웃 고을 관원들도 그 노련한데 모두 감복했고 가끔 판단키 어려운 사건이 있으면 반드시 찾아와 질의를 하였다. 
항상 대인관계에 겸손 하고 공손하여 가식적인 것을 하지 않으셨고 미천한 사람을 대할 때도 반드시 갓쓰고 띠를 띠고서야 만났고 옆에 모시고 있는 자제들도 한다리에 의지하고 기대여 서거나 들어 눕는 때를 본 일이 없고 병이 위중할 때도 머리빗질과 세수를 잊지 않으셨고 비록 미움을 드릴 때도 의관을 하지 않고는 받지 않으셨으며 태만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으니 이는 관습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집에서 지내실 때는 항상 일찍 일어나시어 서책을 읽으시고 가끔 글씨도 쓰시고 그 밖에 노를 꼬거나 그물을 뜨는 일에 이르기까지 손을 놀리는 때가 없으셨다. 만년에는 󰡔자경편(自警編)󰡕과 󰡔주자절요(朱子節要)󰡕를 즐겨 열심히 탐독하시며 고달픔을 잊곤 하셨다. 글씨의 필법이 정묘하시어 늙으셔서도 쇠하지 않으셨으며 편지 답장도 모두 자필로 하시되 글자의 변이나 방의 가는 획도 역시 분별, 분석을 잘하도록 하셨다. 돌아가시는 그날 아침에도 정신과 말씀이 오히려 평상시와 조금도 차이가 없으셨으니 평소에 소양하신 바탕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평일에 그분이 비록 학문에만 전력하시지 않았다고 하시드라도 충(忠)과 신(信)이 안으로 채워져 있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마음을 정해 세우고 행동을 항상 규제하므로써 옛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으셨다. 남과 대화 때에도 체면이 손상되지 않을까 하고 조심조심하시며 때로 의연히 우뚝선 그 덕스러운 모습은 어찌 그 천품의 미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항상 자제에게 경계하시기를 세상 명사 중에서도 교 류를 삼가지 않음에 인하여 화패를 당하는 일이 많고 명리를 좋아하는 자 또한 화패가 미치지 않는 자 거의 드물다고 하셨다. 가정훈계가 이러하시니 그 여러 자제들이 몸가짐을 단정히 하면서 조심하여 지킴으로써 동류들과의 거리가 멀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공의 배위(配位)는 유씨(柳氏)이시니 문화(文化) 인망높은 가문의 긍천현감 증좌찬성 휘 주(霔)의 증손이요 사헌부장령 증영의정 휘 정수(廷秀)의 손자이요. 사도시정 휘 엄(渰)의 따님이시다. 그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니 성균관사성 각(殼)의 따님이시다. 명문의 규수로 부덕을 모두 갖추셨는데 공과 동년생으로 1522년(중종 17, 임오년) 5월 17일로 월일은 공보다 뒤이다. 화락한 부부생활 24년에 규문이 엄숙하고 화합하였으며 공의 미관박봉에도 알맞게 가정을 관리하시면서 제사 때 제수차림은 정성을 다하셨고 아침저녁 식사에도 극히 정결하게하고 살림의 군색한 사정을 공히 눈치 채지 않도록 하셨으며 남을 대할 때는 경애롭게 하셨고 상대방과 거슬리는 언동을 하지 않으시니 친척들은 그 현명한 데 모두 복종하였고 종들도 그 은혜로움에 싸였다.

 

1564년(명종 19, 갑자년) 8월 30일에 용담현 관사에서 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나이 겨우 43세이셨다. 가정살림이 점점 나아지고 자손들이 성장하여 출세하는 영광도 미처 보시지 못하셨으니 몹시 불행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돌아가신 지 42년 후에야 공의 묘와 합폄(合窆)하였다. 두 아들이 귀히 되시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참록으로 공께서 좌찬성겸 판의금 벼슬이 추증됨에 이르러 부인에게도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시니 아-! 아름답도다! 무릇 3남 2녀를 낳으셨으니 장남은 승의랑(承議郞) 저(渚)이시니 장수를 못 하셨고 차남은 가의대부 충청도 관찰사 식(湜)이요 그 다음은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용(涌)이신데 모두 문과를 하셨다. 따님은 맏이는 이근(李瑾)에게 시집가셨고 다음은 김정준(金廷俊)에게 시집가셨는데 모두 사과(司果)벼슬을 하셨다. 승의랑은 적순부위(迪順副尉) 김정준(金廷俊)의 따님에게 장가드시어 두아들을 두셨으니 득준(得濬)과 득해(得海)요, 후취는 현감 구심언(具審言)의 따님이신데 한 아들 득호(得灝)를 두셨다. 감사는 현감 노개(盧塏)의 따님에게 장가드시어 2남 4녀를 두셨는데 장남 득자(得滋)는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요, 다음 득연(得淵) 은 생원이요, 맏따님은 생원 김덕민(金德民)에게 시집가셨고 다음은 우홍업(禹弘業)에게 시집가셨으며 다음은 강석기(姜碩期)에게 시집가셨고 다음은 진사 이진영(李晋英)에게 시집가셨다. 승지는 이조판서 이문형(李文馨)의 따님에게 장가드시어 3남 2 녀를 낳으셨는데 장남 득패(得沛)는 사헌부감찰이요, 다음 득유(得游)는 진사요, 다음은 득치(得治)요, 따님은 진사 최시량(崔始量)에게 시집가셨고 다음은 어리고 후취(後娶)는 영원군(寧原君) 홍가신(洪可臣)의 따님이시다. 이근의 한 아들은 득영(得英)이요, 김정준의 한 아들은 지선(至善)이요, 한 딸은 선전관 한밀(韓謐)에게 시집갔다. 득준(得濬)은 구대륜(具大倫)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두 딸을 낳았는데 어리고 득해(得海)는 박지(朴祉)의 따님에게 장가 들어 1남 1녀를 낳았고 득준이 아들없이 일찍 돌아가셨음에 득해에 명하여 그 아들로 잇게 하였다. 득호는 통정대부 신호학(愼好學)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득자(得滋)는 소순복(蘇純福)의 따님에게 첫 장가 들었고 재취는 도사 유지경(柳止敬)의 따님과 하였고 득연은 우찬성 정창연(鄭昌衍)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어리고 김덕민(金德民)은 1녀를 낳았고 우홍업(禹弘業)은 남녀 각각 하나를 낳았고 강석기와 이진영은 모두 1남 낳았는데 어리다. 득패 는 종실인 해풍군(海豊君) 기(耆)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2녀 낳았는데 어리고 득유는 정랑 안응원(安應元)의 따님에게 첫 장가들어 1남 낳았는데 어리고 재취는 군수 심곤(沈閫)의 따님이다. 이덕영은 안경국(安慶國)의 따님에게 첫 장가 들었고 김응려 (金應礪)의 따님에게 재취하여 2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공이 또 측실이 있었으니 그 아들 은(㶏)은 무과에 급제하여 제물포 만호로 자녀도 있고 그 매씨(妹氏) 2인인데 1인은 문과 부사 윤면(尹勉)에게 시집 갔고 1인은 이인필(李仁弼)에게 시집 갔는데 모두 자녀가 있다. 감사 또한 측실에서 딸 둘을 낳았으니 어느 사이 그렇게도 자손이 번성하단 말인가!

 

 
감사군(監司君)이 나와 40년 오랜 친구일뿐 아니라 여러 번 헌수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대군자의 모습을 우러러 뵈었다 하여 곧 공의 가계와 행의(行誼)와 치적과 역임과 수년(壽年)을 갖추어 기록하여 가지고 와서 명(銘)을 청해 마지않으니 감히 거칠고 서툴다해서 사양치 못하고 마침내 그를 위하여 명을 한다. 높은 나무 옛집은 나라와 함께 길이 존재하는 법, 영성(靈城, 고령)의 신씨는 자손대대 문과했네. 엄헌공(嚴軒公)과 보한재공(保閑齋公)은 서로 이어 문채 빛났도다. 참군공(叅軍公) 이후는 명성과 관위 약간 처졌으나 천품적 신(神)과 같은 훌륭한 인물 태어나니 가정(嘉靖, 명의 연호) 초에 있던 일. 효하고 삼가고 선량하고 온순하고 좋은 명문과 좋은 명예더니 아! 세운의 비색(否塞)을 만나 과장(科場)을 털어 버리다. 인재란 반드시 쓰여지기 마련이어서 의당 관복 입을 때가 왔다. 벼슬은 작고 크고 있었으나 몸에는 고임(寵愛)도 없고 욕됨도 없도다. 있는 곳마다 삼가고 또 삼가하여 항상 깊은 못 가나 깊은 골짜기에 임한 듯. 여러 고을 원을지냈으니 전후 몇 년이던가! 인화와 대범으로 다스리니 백성이 모두 편안하도다.
칭송은 비(碑) 대신 입에서 입으로 마침내는 거사비 세워지다. 한(漢)나라 조정의 순리라도 역시 이와 비교할 사람 드물리라. 세상이 모두 존경할 사람들을 겸비하였으니 하나는 덕이요 하나는 연치로다. 조정에서 큰 은총 내리고 남극의 별빛 비추었네. 금장(金章)과 적불(赤紱)은 재상의 지위요, 학발(鶴髮)과 구장(鳩杖)은 산림과 수택의 신화(神化)같구려. 좋은날 수연 잔치에 삼공과 경대부 모두 모였네. 잔들어 헌수하니 화기는 애애하도다. 슬하의 두 아들 노래자(老萊子, 주대의 효자) 본받아, 함께 때때옷 입고 어린이 춤을 춘다. 효는 뜻 받드는데 두고 맛있는 음식뿐 아니다. 살아서 섬기고 죽어서 섬김에 지성이라 하고 예라 했도다.귀신은 복 내려주고 조정은 우로은(優老恩) 내려 벼슬 추증하고 제문 내려 글귀마다 극찬했네. 공의 옛 선대에는 문장으로 나타났고 오늘 공의 나타남은 어질고 착한데 서 말미암았다. 󰡔주역(周易)󰡕 신괘(頣卦)의 정길(貞吉, 지조를 반듯이 지킴으로써 행이(幸) 온다는 뜻)은 슬픔과 영화의 시종이로다. 만년 유택 이곳이여 남은 경사 천년나가리.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경령경연감춘추관사 심희수 짓고 
통정대부 전행 면천군수 이산뢰 쓰고
가선대부행홍문관부제학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여이징 전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