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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서면 사정리 사기점유래비(郡西面 沙亭里 沙器店由來碑) 본문
사정리 마을 이름이 있게 한 사기점은 고려 때부터 사기를 구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곳곳에 자기 파편이 흔한데 밭을 일구고 땅을 파헤쳐 지금은 사기를 구웠던 가마터 위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사기점에는 또 옛 절터가 남아 있다. 절터 흔적은 한 가정집에 남아 있는데 기록이 없어 절의 이름이나 창폐 연대를 알 수 없으나 현재 1개씩 남아 있는 탑 옥개석과 장대석으로 보아 고려때 유행하던 양식이어서 고려시대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행정에는 경주이씨(慶州李氏) 문중이 13대 이상 살고 있다. 행정마을 입구에는 마을에서 쓰던 연자방앗돌이 있고, 청년들이 돈을 모아 만든 유래비가 오가는 이를 반긴다. 청년들은 또 군서-옥천읍간 37호 국도변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진입로에 살구나무를 심어 마을의 옛 지명유래를 살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사정리(沙亭里)는 원래 군서면 은행정리(銀杏亭里)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은행리와 사정리로 나누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는 군서면 은행정리라 하여 56호가 살았으며, 1891년의 기록에는 67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 1908년 군, 면을 조정해 군서면을 군서일소면(郡西一所面)과 군서이소면(郡西二所面)으로 나누면서 은행정리는 이소면에 속하게 하였다.1914년 행정구역을 전면 조정할 때 일소면, 이소면을 합쳐 다시 군서면으로 고치고, 이때 은행정리를 은행리와 사정리로 나누었다.사정리라 부르게 된 것은 사기점(沙器店) 마을의 사자와 행정(杏亭)의 정자를 한자씩 취하여 사정리라 하였다. 사기점은 이 마을에 고려 때부터 청자와 백자를 굽던 곳이기 때문에 사기점이라 하였고, 행정은 이 마을에 살구나무가 많고 살구나무 숲이 있어 “살구정”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쓰면서 살구 행, 정자 정자를 써서 행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정리의 자연마을로는 사기점, 살구정이, 마전동, 구억말, 말래 등이 있고, 사정리 마을 이름이 있게 한 사기점은 고려 때부터 사기를 구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곳곳에 자기 파편이 흔한데 밭을 일구고 땅을 파헤쳐 지금은 사기를 구웠던 가마터 위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사기점에는 또 옛 절터가 남아 있다. 절터 흔적은 한 가정집에 남아 있는데 기록이 없어 절의 이름이나 창폐 연대를 알 수 없으나 현재 1개씩 남아 있는 탑 옥개석과 장대석으로 보아 고려때 유행하던 양식이어서 고려시대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행정에는 경주이씨(慶州李氏) 문중이 13대 이상 살고 있다. 행정마을 입구에는 마을에서 쓰던 연자방앗돌이 있고, 청년들이 돈을 모아 만든 유래비가 오가는 이를 반긴다. 청년들은 또 군서-옥천읍간 37호 국도변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진입로에 살구나무를 심어 마을의 옛 지명유래를 살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마전동(麻田洞)은 조선시대 유명한 풍수가인 토정 이지함 선생이 얽힌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군서면에는 군서 8명당이란 것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작약미발(芍藥未發, 함박꽃 봉오리 모양의 지형)’이고 사정리와 뒷산인 홍산의 형세가 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토정 선생은 자신이 죽으면 사정리 작약미발형 땅에 묻어줄 것을 하인인 신개에게 당부했는데 토정이 죽은 후 상여를 메고 오다가 그만 신개마저 급사해버리니, 토정의 상여는 결국 작약미발 명당을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신개가 죽으면서 했던 말이 ‘삼밭’이었고, 그 말에 따라 마을이름이 삼밭, 즉 마전(麻田)이라고 했다는 전설이다.
마전마을 앞에는 1914년에 세운 김기영선생과 1930년에 세운 김성희선생의 송덕비가 나란히 있다. 김기영선생과 김성희선생은 군서면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자신의 재산을 풀어 세금을 대신 내주고, 양식을 주는 등 선행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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