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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북이면 문숙영당 (北二面 文肅影堂) 본문
문숙영당은 고려의 명장으로 여진(女眞)을 정벌하여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이 된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숙공(文肅公) 윤관(尹壇, ?∼1111) 장군의 영정을 봉안한 파평윤씨(核平尹氏)의 사당이다. 매년장군의 탄신일인 음력 3월 10일에 향사한다.
영정은 갑옷을 입고 활을 들고 있는 전신입상(全身立像)으로 가로 75cm 세로170cm의 설채견본(設彩絹本)이다. 함경도 북청의 만뢰사(萬賴祠)에 봉안된 영정을 1902년 윤석훈(尹商勳)이 모사한 것은 현재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고, 영당에는 1980년에 민복진(閣福鎭)이 그린 관복(官服) 차림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인 가로 65cm, 세로 110cm의 설채견본을 봉안하고 있다.
지금의 영당은 1980년에 중건하고 1984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1간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으며"호남사(湖南祠)"라는 현판을 걸었고 앞에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1. 가계와 관직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낸 집형(執衡)의 아들이다. 문종 때에 등과, 습유(拾遺)·보궐(補闕)을 지냈고, 1087년(선종 4)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출추사(出推使)가 되어 광주(廣州)·충주·청주를 시찰하였다.
1095년 숙종이 즉위하자 좌사낭중(左司郞中)으로 형부시랑 임의(任懿)와 함께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숙종 3) 동궁시학사(東宮侍學士)로서 조규(趙珪)와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를 통고하였다.
1099년에 우간의대부 한림시강학사(右諫議大夫翰林侍講學士)가 되었으나 당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이던 임의와 친척이어서 간원(諫院)인 어사대(御史臺)에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중서성(中書省)의 상서에 따라 해면되었다.
2년 뒤인 1101년에는 추밀원지주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왕명에 의하여 이굉(李宏)과 함께 진사시를 주관하였으며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다음해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吏部尙書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가 되었다.
1095년 숙종이 즉위하자 좌사낭중(左司郞中)으로 형부시랑 임의(任懿)와 함께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숙종 3) 동궁시학사(東宮侍學士)로서 조규(趙珪)와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를 통고하였다.
1099년에 우간의대부 한림시강학사(右諫議大夫翰林侍講學士)가 되었으나 당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이던 임의와 친척이어서 간원(諫院)인 어사대(御史臺)에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중서성(中書省)의 상서에 따라 해면되었다.
2년 뒤인 1101년에는 추밀원지주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왕명에 의하여 이굉(李宏)과 함께 진사시를 주관하였으며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다음해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吏部尙書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가 되었다.
2. 여진을 정벌하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104년 2월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이 되어 처음으로 여진정벌의 임무를 띤 때부터 1111년(예종 6) 죽을 때까지의 약 7년간이다. 고려가 처음으로 동여진을 대규모로 정벌하기 시작한 것은 1080년(문종 34)으로 이때 여진의 세력을 크게 꺾은 바 있다.
그러나 새로 일어나는 동여진 완안부족(完顔部族)은 더욱 성장하여 그 부족장 영가(盈歌)에 이어 1103년(숙종 8)에 우야소(烏雅束)가 그뒤를 이었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충돌 직전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定州關) 밖에 쳐들어오게 되었다. 왕은 무력으로 여진정벌을 결심하고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시켜 이를 평정하게 하였으나 여진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때에 윤관은 왕명을 받고 여진에 대한 북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해 2월 21일 당시 추밀원사로 있던 그는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이 되어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고려군은 여진의 강한 기병에 부딪혀 그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을 당하였다. 이에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의 원인은 적의 기병을 우리의 보병으로는 능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왕에게 보고하고,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윤관은 1104년(숙종 9) 12월부터 여진토벌을 위한 준비확장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별무반(別武班)이라고 하는 특수부대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1107년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하지 않다는 한 변장(邊將)의 긴급보고를 접하자 원수가 되어 부원수인 지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과 17만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한편, 여진추장에게 거짓통보를 하여 고려가 앞서 잡아둔 허정(許貞)·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낸다고 하자 여진족 400여명을 보내왔는데, 이때 이들을 유인하여 거의 섬멸시키고 사로잡았다.
5만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중군(中軍)은 김한충(金漢忠), 좌군(左軍)은 문관(文冠), 우군(右軍)은 김덕진(金德珍)으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으며, 수군(水軍)은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竦) 등이 2,600명으로 도린포(都鱗浦)의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막강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이 동음성(冬音城)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石城)은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패주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태반을 섬멸하였다.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무찌른 곳은 135개처, 적의 전사자 4,940명, 생포 130명의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조정에 전승의 보고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획정하고 9성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새로 일어나는 동여진 완안부족(完顔部族)은 더욱 성장하여 그 부족장 영가(盈歌)에 이어 1103년(숙종 8)에 우야소(烏雅束)가 그뒤를 이었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충돌 직전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定州關) 밖에 쳐들어오게 되었다. 왕은 무력으로 여진정벌을 결심하고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시켜 이를 평정하게 하였으나 여진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때에 윤관은 왕명을 받고 여진에 대한 북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해 2월 21일 당시 추밀원사로 있던 그는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이 되어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고려군은 여진의 강한 기병에 부딪혀 그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을 당하였다. 이에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의 원인은 적의 기병을 우리의 보병으로는 능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왕에게 보고하고,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윤관은 1104년(숙종 9) 12월부터 여진토벌을 위한 준비확장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별무반(別武班)이라고 하는 특수부대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1107년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하지 않다는 한 변장(邊將)의 긴급보고를 접하자 원수가 되어 부원수인 지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과 17만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한편, 여진추장에게 거짓통보를 하여 고려가 앞서 잡아둔 허정(許貞)·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낸다고 하자 여진족 400여명을 보내왔는데, 이때 이들을 유인하여 거의 섬멸시키고 사로잡았다.
5만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중군(中軍)은 김한충(金漢忠), 좌군(左軍)은 문관(文冠), 우군(右軍)은 김덕진(金德珍)으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으며, 수군(水軍)은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竦) 등이 2,600명으로 도린포(都鱗浦)의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막강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이 동음성(冬音城)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石城)은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패주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태반을 섬멸하였다.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무찌른 곳은 135개처, 적의 전사자 4,940명, 생포 130명의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조정에 전승의 보고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획정하고 9성을 축조하였다.
3. 9성을 설치하다
그리고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남도지방의 이주민들이 이곳을 개척하여 살게 되었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咸州)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英州)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雄州)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福州)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吉州)에 성곽 670칸, 이주민 680가구, 공험진(公嶮鎭)에 이주민 532가구를 이주시켰다. 이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윤관의 9성 설치가 완결되었다. 특히 함흥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어 이곳이 가장 요충이 되었다.
고려군이 이렇게 함경도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가 반발하여 1108년초에 군사를 이끌고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가한촌(加漢村)의 전투에서 포위당하였으나 척준경 등의 역전으로 겨우 구출되었으며, 영주성의 공방전에서는 역시 척준경의 용맹과 기지로써 여진군을 겨우 물리치게 되었다.
또다시 여진군 수만명이 웅주성을 포위하자 역시 척준경의 지략과 용기로써 적을 패주시켰다. 그해 3월 30일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00두를 노획하여 개경으로 개선하여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에 봉하여졌다.
고려군이 이렇게 함경도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가 반발하여 1108년초에 군사를 이끌고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가한촌(加漢村)의 전투에서 포위당하였으나 척준경 등의 역전으로 겨우 구출되었으며, 영주성의 공방전에서는 역시 척준경의 용맹과 기지로써 여진군을 겨우 물리치게 되었다.
또다시 여진군 수만명이 웅주성을 포위하자 역시 척준경의 지략과 용기로써 적을 패주시켰다. 그해 3월 30일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00두를 노획하여 개경으로 개선하여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에 봉하여졌다.
4. 여진정벌, 실패로 끝나다
서쪽에 강력한 요나라와 접경하고 있던 여진은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게 되었으나, 윤관의 9성 축조와 농업이주민으로 말미암아 농경지를 빼앗긴 토착 여진족으로서는 강력히 반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길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원하였다.
드디어 여진은 적극적인 강화교섭을 개시하였으며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환부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평장사 최홍사(崔弘嗣) 등 28명은 찬성하고 예부낭중(禮部郞中) 한상(韓相)은 반대하였으나 당시 조정은 화평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이유는 여진을 공략함에 있어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의 예측이 맞지 않았고, 근거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으며,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거리가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무리한 군사동원으로 백성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 등이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하여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윤관이 장병들과 더불어 생명을 걸고 경략하였던 9성 일대의 땅이 다시 여진에게 환부되었다. 뒤에 아골타(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워 강대한 국가가 된 데에는 그들이 9성을 다시 찾은 데 그 원인이 있었다고 본다.
9성의 환부로 여진정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조차 삭탈당하였다. 명분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하였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도 대두되었으며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못한 채 사제(私第)로 돌아갔다.
그러나 처벌을 하여야 한다는 재상이나 대간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그를 비호한 예종의 덕으로 1110년 다시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1130년(인종 8)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시호는 처음에 문경(文景)이었으나, 후에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드디어 여진은 적극적인 강화교섭을 개시하였으며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환부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평장사 최홍사(崔弘嗣) 등 28명은 찬성하고 예부낭중(禮部郞中) 한상(韓相)은 반대하였으나 당시 조정은 화평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이유는 여진을 공략함에 있어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의 예측이 맞지 않았고, 근거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으며,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거리가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무리한 군사동원으로 백성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 등이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하여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윤관이 장병들과 더불어 생명을 걸고 경략하였던 9성 일대의 땅이 다시 여진에게 환부되었다. 뒤에 아골타(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워 강대한 국가가 된 데에는 그들이 9성을 다시 찾은 데 그 원인이 있었다고 본다.
9성의 환부로 여진정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조차 삭탈당하였다. 명분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하였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도 대두되었으며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못한 채 사제(私第)로 돌아갔다.
그러나 처벌을 하여야 한다는 재상이나 대간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그를 비호한 예종의 덕으로 1110년 다시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1130년(인종 8)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시호는 처음에 문경(文景)이었으나, 후에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씨스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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