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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북이면 최유경효비각(北二面 崔有慶孝碑閣) 본문
[진천에 있는 최유경의 정려이다}
이 효자비는 조선 숙종 26년(1700)에 효행으로 나라에서 정려한 최유경(崔有慶)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효자비이다.
비의 전면에는 "조선효자 참찬평도공최유경지문(朝鮮孝子 參贊平度公崔有慶之門)"이라 음각하였다.
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1988년에 세운 비각은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을 홍살로 막았다.
비의 전면에는 "조선효자 참찬평도공최유경지문(朝鮮孝子 參贊平度公崔有慶之門)"이라 음각하였다.
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1988년에 세운 비각은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을 홍살로 막았다.
최유경(崔有慶)에 대하여
1343년(충혜왕 복위 4)∼1413년(태종 13).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 선부전서(選部典書) 상호군 득평(得枰)의 손자로, 감찰대부(監察大夫) 재(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씨(朴氏)로 군부정랑(軍簿正郞) 윤류(允槱)의 딸이다.
1372년(공민왕 21)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郞)이 되어 각 도의 의염(義鹽)의 염분(鹽盆)이 강호(强豪)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진달하여 염창(鹽倉)에 속하게 하였고, 이어 사헌부장령이 되어 왕의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게 불법을 자행하던 환관(宦官) 윤충좌(尹忠佐)를 탄핵하였다.
1375년(우왕 1) 전법사총랑(典法司摠郞)이 되고, 1388년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가 되어 전민(田民)의 폐단을 고찰하여 바로잡았다. 이해 여름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서북면전운사 겸 찰방으로 있으면서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 감행되자 우왕에게 고변하였고, 최영(崔瑩)이 실각한 뒤에도 창왕의 즉위와 함께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발탁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이성계가 즉위하여 개국공신에 이어 원종공신(原從功臣)을 녹훈할 때, 앞서 위화도회군을 우왕에게 고변하였다 하여 일부 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이성계가 그 충의를 칭찬함으로써 개국원종공신에 서훈되었다.
1395년에 경상도도관찰사가 되고, 1397년에는 지중추원사로서 경기·충청도 도체찰사가 되어 지방을 순유하고, 그 이듬해 중추원부사로서 왕의 사명을 띠고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 최영지(崔永沚)에게 궁온(宮醞)과 관교(官敎)를 전하여 선위(宣慰)하였다.
같은해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서 경기우도도관찰출척사(京畿右都都觀察黜陟使)로 나가는 등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여러 차례 왕의 특사로 중임을 수행하였다.
1401년(태종 1) 대사헌이 되었고, 그해 육조와 대간의 천거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1404년 판한성부사로서 치사(致仕)하였다.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1372년(공민왕 21)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郞)이 되어 각 도의 의염(義鹽)의 염분(鹽盆)이 강호(强豪)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진달하여 염창(鹽倉)에 속하게 하였고, 이어 사헌부장령이 되어 왕의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게 불법을 자행하던 환관(宦官) 윤충좌(尹忠佐)를 탄핵하였다.
1375년(우왕 1) 전법사총랑(典法司摠郞)이 되고, 1388년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가 되어 전민(田民)의 폐단을 고찰하여 바로잡았다. 이해 여름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서북면전운사 겸 찰방으로 있으면서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 감행되자 우왕에게 고변하였고, 최영(崔瑩)이 실각한 뒤에도 창왕의 즉위와 함께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발탁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이성계가 즉위하여 개국공신에 이어 원종공신(原從功臣)을 녹훈할 때, 앞서 위화도회군을 우왕에게 고변하였다 하여 일부 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이성계가 그 충의를 칭찬함으로써 개국원종공신에 서훈되었다.
1395년에 경상도도관찰사가 되고, 1397년에는 지중추원사로서 경기·충청도 도체찰사가 되어 지방을 순유하고, 그 이듬해 중추원부사로서 왕의 사명을 띠고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 최영지(崔永沚)에게 궁온(宮醞)과 관교(官敎)를 전하여 선위(宣慰)하였다.
같은해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서 경기우도도관찰출척사(京畿右都都觀察黜陟使)로 나가는 등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여러 차례 왕의 특사로 중임을 수행하였다.
1401년(태종 1) 대사헌이 되었고, 그해 육조와 대간의 천거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1404년 판한성부사로서 치사(致仕)하였다.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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